INVESTMENT / The Sage Investor
2023. 09. 18
반도체 대국 복귀 노리는
일본 라피다스의 도전
The Sage Inve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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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반도체 강국이었던 일본이 미국의 협력을 배경으로 반도체 전문기업 라피다스를 세우고 반도체 컴백을 선언했다.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된 일본의 국책기업 라피다스(ラピダス, Rapidus Corporation)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피다스는 지난 2월 28일 홋카이도 치토세 시에 신공장을 건설한다고 밝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25일에 시공사 선정까지 완료했다. 수주한 곳은 일본 굴지의 종합건설회사인 가시마(鹿島)다. 9월에 착공하여 2025년에 완공할 예정이다. IBM이 개발한 최첨단 2나노 반도체 양산은 2027년부터 시작된다.

일본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사업을 석권하고 있었다. 1989년에는 NEC, 도시바, 히타치제작소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점유율 톱 3를 차지했고 톱 10에는 후지쯔, 미쓰비시전기, 마쓰시타전자공업(현 파나소닉)까지 6개사가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022년에는 톱 10에 일본 기업의 이름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전성기에는 50%를 넘던 일본 기업의 세계 시장점유율도 이제 10%가 채 되지 않는다. 반도체 업체들은 회로 폭을 최대한 줄여 성능을 높이는 미세화 기술을 놓고 경쟁하고 있지만 일본은 자동차나 일반산업에 주로 사용되는 40나노미터의 낡은 반도체 공정에 머물러 있다.

반면 반도체 생산의 주류인 5나노에서 16나노 정도의 스마트폰과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개발은 타이완 TSMC와 한국 삼성전자, 미국 인텔의 독무대가 됐고 TSMC와 삼성은 지난해부터 3나노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자율주행 분야에서는 미국의 테슬라와 엔비디아가 완전 자율주행으로 이행하려 하고 있어 2나노 기술은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완전 자율주행 이외에도 고성능 컴퓨터, 스마트폰 제품 등에서도 2나노 기술은 쓰임새가 커지고 있다. 그 때문에 TSMC나 삼성도 2025년까지 2나노 실용화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라피다스가 설립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라피다스가 태어난 계기는 미국의 바이든 정권에 의한 반도체의 국제 제휴 구상이다. 중국이 급속히 부상하는 가운데 미국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개발에서 국제공조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 타깃이 된 곳이 타이완, 한국, 그리고 일본으로 이 3개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반도체 공급망 칩 4 동맹을 구축함으로써 중국에 맞서는 것이 반도체 공조의 목적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반도체 세계제일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에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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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다스가 태어난 계기는 미국의 바이든 정권에 의한
반도체의 국제제휴 구상이다.
중국이 급속히 부상하는 가운데 미국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개발에서 국제공조를 구축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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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3세대 모델로 승부
2019년 여름 산업기술종합연구소(산총연)와 도쿄대 등 5개 대학과 연구기관이 핵심이 돼 운영하는 일본 최대 나노기술연구·교육 거점, TIA(쓰쿠바 이노베이션 아레나)의 운영 최고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도쿄일렉트론의 전 사장 히가시 테츠로(東哲郎, 현 라피다스 회장)에게 전부터 알던 사이인 미국 IBM의 기술부문 중진 존 켈리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다. “2나노 기술 개발에 성공했는데 일본에서 양산할 수는 없을까?”

IBM은 이미 반도체 생산에서 철수했고 2014년에는 미국 버몬트 주의 제조공장을 매각했다. 그러나 연구 부문은 그대로 두고 뉴욕주 반도체 연구시설 알버니연구소에서 최첨단 반도체 연구를 계속해 최첨단 기술을 외부에 라이선스 공여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 라피다스에 대한 기술 공여도 그런 사업의 일환으로 IBM은 삼성, 인텔과도 파트너십 관계에 있었지만 2나노 기술 공여는 라피다스가 최초였다.

존으로부터 2나노 기술 공여 이야기를 들은 히가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소니와 도시바에 타진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했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투자이기 때문이었다. 히가시는 히타치 제작소의 생산 기술 담당을 경험한 적이 있는 웨스턴 디지털 저팬의 회장, 고이케 아쓰요시(小池淳義, 현 라피다스 사장)에게 과연 일본에서 실용화가 가능한지 기술 검증을 의뢰했다.

고이케는 젊은 연구자를 모아 IBM의 기술을 검증하는 회의를 시작해 기술면뿐만 아니라 경영의 관점도 아우른 ‘20년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에서 기술면뿐만 아니라 경영적 측면에서도 2나노 양산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구상의 기반이 된 것이 ‘첨단 3세대 모델’이다. 최첨단부터 이전 3세대까지만 생산한다는 것으로 구형부터 신형까지 풀라인업으로 개발, 제조, 판매하고 있는 TSMC의 비즈니스 모델과는 선을 긋겠다는 의도다.

TSMC의 비즈니스 모델은 상각된 낡은 설비에서 개발한 반도체로 수익을 내면서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첨단 반도체 개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지만 라피다스는 TAT(Turn Around Time, 한 개의 과정이 완성되기까지의 소요시간) 파일럿 라인을 구축해 사이클 타임을 빠르게 돌려 높은 가격에 최첨단 반도체를 팔아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반도체 생산 시간이 단축되면 최종 제품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수익을 확대할 수 있다. 라피다스 입장에서도 공장 설비를 빨리 돌리면 효율이 올라간다. 서로 이익을 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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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다스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은 ‘첨단 3세대 모델’이다.
최첨단부터 이전 3세대까지만 생산한다는 것으로 구형부터 신형까지
풀라인업으로 개발, 제조, 판매하고 있는
TSMC의 비즈니스 모델과는 선을 긋겠다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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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재의 제휴로 출범한 라피다스
히가시는 직접 자금 조달에도 나섰다.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거액의 투자가 필요하다. 아직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반도체 개발에 민간기업이 솔선해 자금을 대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래서 자민당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2021년 5월부터 자민당 반도체전략추진 의원연맹회장) 중의원 의원과 상의했다고 한다.

한편 경제산업성은 2021년 3월에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회의’를 만들었다. 의장에는 히가시 테츠로, 이 외 멤버에는 덴소 CTO 가토 요시후미(加藤良文), NTT 사장 사와다 준(澤田純), NEC 부사장 모리타 다카유키(森田隆之), 기오쿠시아 사장 하야사카 노부오(早坂伸夫) 등 후일 라피다스에 출자하게 되는 기업의 대표들이 있었다. 이 전략회의에서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이 주로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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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반도체 협력의 기본을 합의한 2022년 5월 24일 미·일 정상회담에서의 바이든과 기시다.
라피다스 구상이 본격적으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미일 정상회담이 있었던 2022년 5월부터다. 5월 4일에 하기우다 고이치 당시 경제산업상과 지나 레이몬도(Gina Raimondo) 미 상무장관 사이에 ‘반도체 협력 기본 원칙’이 합의되었고, 13일에는 IBM의 수석부사장, 다리오 길(Dario Gil)이 일본을 방문하여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났다. 이때 기시다는 “혁신을 추구하는 여러 분야 가운데 특히 차세대 반도체의 실용화에 대담하게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일본에 의한 연구 개발의 촉진에 대해서도 “논의를 더욱 빨리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일 정상회담이 열린 5월 23일에는 이미 합의한 ‘반도체 협력 기본 원칙’에 근거하여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의 태스크포스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미일 경제정책협의위원회(양국의 외교, 경제 장관이 참석하는 2+2 협의체)에서 중요·신흥기술의 육성·보호를 위해서 미일이 공동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일본도 미국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와 파트너로 협력할 연구개발 조직의 발족을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 라피다스 설립을 위해 히가시와 고이케는 토요타자동차 임원 야마모토 게이지, 자동차부품회사 덴소CTO 가토, 통신사NTT 회장 사와다 등에게 출자를 호소했다. 이외에도 소니, NEC, 소프트뱅크, 기오쿠시아(반도체기업), 미쓰비시UFJ은행 등 총 8개사가 라피다스 출자를 수락했다.

출자금액은 소니와 토요타자동차, 덴소 등 7개사가 각각 10억 엔, 미쓰비시 UFJ은행이 3억 엔을 출자하고 정부가 700억 엔을 투입했다. 라피다스는 8월 설립되어 회장에는 히가시, 사장에는 고이케가 취임했다. 곧바로 라피다스는 경제산업성 소관의 국립연구개발법인 신에너지·산업기술 종합개발기구(NEDO)가 공모한 ‘포스트 5G 정보통신 시스템 기반 강화 연구개발 사업/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개발’에 응모했다.

경제산업성은 11월 11일 ‘차세대 반도체의 설계·제조 기반 확립을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경제산업성은 차세대 반도체 연구를 위한 새로운 연구개발 조직으로 ‘최첨단 반도체기술센터’(Leading-edge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 LSTC)를 만들기로하고, 그 협력선을 라피다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LSTC의 이사장에는 히가시가 취임했으며, 국내외 학술연구기관·기업과 제휴하여 라피다스는 제조를 맡고, LSTC는 첨단기술이나 첨단장치, 소재기술의 연구개발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으로 윤곽을 정했다. 또 일본 정부는 11월 8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추가경정예산안에도 반도체 연구개발과 생산거점 정비를 위해 1조 3천억 엔을 책정했다.
2나노 다음엔 1나노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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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3일 도쿄에서 고이케 아쓰요시 라피다스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다리오 길 IBM 수석부사장(왼쪽에서 세 번째)은 반도체 공동 개발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라피다스는 이미 공장 건설에 나서고 있다. 2월 28일에는 고이케가 홋카이도 지사 스즈키 나오미치를 만나 치토세 시에 공장을 건설할 것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나아가 4월 19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홋카이도 치토세 시에 건설하는 공장에 관한 구상이나 인원 확보의 진척 상황 등을 설명했다. 치토세 공장은 100헥타르의 토지에 제조동을 2동 이상 설치해 각 동을 2나노 이후의 다른 기술 세대에 대응시킬 방침이다.

치토세 시를 택한 것은 반도체 수요가 확대될 경우 대응할 수 있는 확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7년에 양산을 시작하는 제1동은 2나노 세대에 대응하고, 같은 부지 내에 건설을 예정하는 제2동은 2나노의 다음세대 반도체를 만들 계획이다. 장차 3~4동 정도까지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각 동의 기술 세대를 순차적으로 갱신해 공장 전체에서 항상 최첨단의 복수세대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제1동 건설에 대해서는 “곧 정부의 승인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승인이 떨어지는 대로 착공하고 싶다”는 것이 고이케 사장의 포부다.

과연 일본의 반도체 컴백이 성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마츠자키 다카시(松崎隆司)
경제 저널리스트. 기업경영이나 M&A, 고용, 사업승계, 비즈니스모델, 경제사건 등을 취재. 현재 니케이비즈니스, 이코노미스트, 프레지던트 등의 경제지나 종합지, 산케이비즈니스아이, 일간 겐다이 등에 기고하고 있다.
※ 본 원고는 외부 필자 의견으로 당사의 투자 의견과는 무관합니다.
출처.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글. 마츠자키 다카시 | 사진.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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