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성탄절, 리옌훙은 난생 처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자신이 8년 후 같은 날 고액의 연봉과 미국 영주권을 버리고 새로운 상업 제국을 건설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해 처음으로 웹사이트가 탄생했지만, 인터넷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1995년 8월 9일, 넷스케이프(Netscape)는 웹 브라우저를 분리해 상장했다.
설립 후 16개월 동안 수익을 낸 적이 없던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27억 달러였다. 이후 20년간, 투자자들은 더 이상 IT회사를 수익으로만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아메리카온라인(AOL), 아마존, 크레 이그리스트(Craigslist: 미국의 지역 생활 정보 사이트)와 이베이(eBay)는 인터넷 수요를 예리하게 포착, 잇달아 다양한 분야의 리더가 되었다. 이로써 인터넷을 미국에서 인기 아이템으로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바다 건너 중국에도 인터넷 산업의 씨앗을 뿌렸다.
넷스케이프 상장 즈음 마윈은 인터넷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딩레이(넷이즈 창업주)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광저우로 내려간 상태였다. 리옌훙은 미국에서 귀국해 중국 시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넷이즈(NetEase)가, 1998년에는 소후닷컴(搜狐, sohu.com)과 시나닷컴(新浪, sina.com)이 설립되었다. 1999년 야후차이나가 정식으로 오픈했다. 이로써 중국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이후 20년 동안 중국 인터넷의 발전 속도는 미국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소후닷컴을 오픈한 장차오양 덕분에 창업 열기에 고취된 마화텅은 같은 해 11월 11일 텐센트를 설립했다. 1년 동안 두 번의 창업에 실패한 마윈은 만리장성에서 18명의 창업 멤버와 함께 울부짖었고, ‘하이퍼텍스트 링크(Hypertext link) 분석’의 특허를 보유하게 된 리옌훙은 브리즈번의 세계 인터넷 컨퍼런스에서 구글 창업자와 첫 만남을 가졌다.
이 3명의 청년은 비슷한 시기 인터넷업계에 잇달아 등장해 20여 년간 지속될 경쟁을 시작한다. 이 1년 동안, 치후360(현 360 시큐리티)의 저우훙이 회장은 멀웨어(Malware: 컴퓨터 사용자 몰래 시스템에 침투하거나 피해를 입히기 위해 설계된 소프트웨어)소프트웨어 3721을 만들었다. 1999년 전후는 인터넷시대의 첫 번째 도약 시기였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넷이즈, 씨트립(Ctrip), JD닷컴 등의 기업이 모두 이 시기에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1984년 중국 전통산업이 급성장한 것처럼, 향후 20년 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비즈니스 제품을 선보일 기업들이 이 때 형태를 갖춘 것이다.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마윈은 치열한 포털 사이트 경쟁에서 탈피해, 전자상 거래 모델 비즈니스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후판화원(湖畔花園)이라는 아파트 단지에 방을 임대해 사무실을 오픈한 첫째 날, 마윈은 18명의 알리바바 창립멤버에게 개업 연설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회사를 만들 것이고, 102살까지 살 것이다.” 이 방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미래를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한 그의 믿음과 열정에 동참했다. 이듬해 1월 리옌훙이 6명의 멤버와 함께 검색엔진 사이트 바이두를 설립했다. 그리고 중국 인터넷의 기본 모델인 ‘포털+커뮤니티+전자상거래+소셜+게임+엔터테인먼트+검색’ 카테고리 구성을 완비 했다.
1999년을 전후해서 이토록 걸출한 인터넷기업이 다수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술 논문 ‘격동30년’(激動三十年)은 이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학기술사, 예술사, 상업사를 살펴 보면 어떤 분야나 국가에 전성기가 온 특정 해에 여러 위대한 인물이나 회사가 집중적으로 탄생한다. 이런 현상은 이성적인 논리로는 유추하기 힘든, 역사에 내재된 드라마틱한 현상이다.”
1세대 유학파는 미국식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을 중국에 도입했다. 그리고 1세대 프로그래머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선두 위치를 다졌다. 유학파와 프로그래머의 조합은 중국 인터넷 시대의 폭발적 성장을 위한 고속도로를 놓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