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야후는 세계 최초로 인터넷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한 사이트였다. 또한 무료 콘텐츠와 유료 광고를 결합한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야후는 줄곧 세계 인터넷 사이트 랭킹에서 1위 왕좌를 차지했다. 또한 2006년 세계 상위 20대 인터넷기업 랭킹에서 야후(1위), 야후 재팬(7위), 야후 차이나(14위)의 세 기업이 세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미국의 구글, 페이스북 그리고 중국의 3대 포털 사이트인 시나닷컴(sina, 新浪), 소후(Soho, 搜狐), 넷이즈(NetEase, 網易)도 모두 야후의 추종자이거나 모방자였다. 그 당시 야후는 제국이었고, 전체 인터넷 포털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후는 자신에게 졌다. 바로 기업 정체성 탐색에 실패한 것이다. 야후가 이룬 중대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유료 광고 방식을 통해 사용자가 인터넷 콘텐츠를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웹 포털 모델을 개척한 것이다. 즉, 야후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광고 판매로 수익을 냈다. 더 많은 광고를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용자를 확대해야 했다. 이처럼 사용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정보와 제품을 제공하고, 전체 인터넷 시장의 활성화를 일궈야 했다.
야후는 전성기에 엄청난 트래픽을 바탕으로 존슨앤존슨(J&J), 네슬레(Nestle), GM 같은 광고주를 유치하며 홈페이지에 브랜드 광고를 게재했다. 당시 인터넷 광고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으며, 고속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캐시카우가 되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야후는 IT기업이 아니라 미디어 기업이었다. 정보의 포털을 만들고 웹 광고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야후의 정체성인 것이다. 트래픽을 늘리기 위해 야후는 트래픽이 많이 발생하는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단편적인 트래픽 추구와 맹목적인 인수합병은 인터넷 버블 현상을 촉발했다. 2000년대 말, 인터넷 버블이 꺼지면서 야후의 주가는 90%나 증발해 업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야후가 적자를 내던 때,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 수잔 데커(Susan Lynne Decker)는 손실이 나는 온라인 결제, 경매, 쇼핑 등의 서비스를 중단했다. 이를 통해 회사 예산을 빠르게 통제했고, 야후는 일시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미래 발전의 원동력도 상실했다. 인터넷 버블이 꺼지고 난 후, 신임 CEO 테리 시멜(Terry Semel)은 전통적인 미디어 사업을 지속했지만, 당시 급부상하던 신기술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당시 야후는 가격 비교 검색이 막대한 부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서둘러 기술을 도입, 온라인 검색서비스에서 구글과 맹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적 배치로 야후는 기존의 브랜드 우위를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기만 했다.
또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계약에서 야후는 검색광고 매출의 수익 배분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 중요한 검색 핵심기술, 인재, 시장 및 사용자 데이터는 순순히 넘겨주었다. 게다가 야후는 검색 서비스를 구글에 아웃소싱하면서, 매년 수백만 달러를 들여 구글을 지원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잘못을 깨달았을 때 이미 구글은 검색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야후 창업자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같은 강한 카리스마가 없었고, 브랜드 정체성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전략 아이디어를 기업 문화의 유전자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야후가 몰락한 근본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