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4일 밤, 한 줄기의 웅장한 불길이 우주를 향해 솟아올랐다. 곧이어 미국 ‘로켓 공학의 아버지’ 폰 브라운은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는 가장 듣기 싫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62일 후, 미국은 인공위성 ‘뱅가드’(Vanguard)를 서둘러 발사했지만, 지면에서 겨우 2m 올라가서 곤두박질쳤다. 미국 전 국민이 TV 앞에 앉아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 순간 미국 전체가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였다. 흐루쇼프는 조롱하듯이 유엔 미국 대표에게 기술 지원이 필요한지 물으며 소련은 후진국을 기꺼이 돕고자 한다고 말했다.
우주를 향한 인류의 탐험과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은 30년에 걸쳐 군비 경쟁을 펼쳤으며, 그 경쟁은 핵폭탄에서 미사일을 넘어 우주 비행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초강대국의 초기 30년여의 경쟁이 실은 두천재의 대결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독일인 폰 브라운, 그리고 소련인 코롤료프이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패전을 직감한 나치 독일은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비밀병기 V-2 로켓으로 런던을 폭격하며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검은 연기가 궤도를 그리며 창공을 가를 때, 모두가 이 로켓의 어마어마한 위력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 유독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V-2 로켓을 개발한 폰 브라운이었다.
V-2 로켓은 단거리 로켓으로 시속 5,760km, 비행거리 320km에 달한다. 당시 모든 비행기가 프로펠러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 기술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폰 브라운은 V-2 로켓이 인류가 우주로 다가가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미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의 군사유산을 챙기기에 바빴다. 나치의 가장 눈부신 기술인 V-2 로켓은 단연코 가장 치열한 쟁탈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미국이 V-2 로켓의 총괄 개발자인 폰 브라운을, 그리고 소련이 V-2 로켓의 생산 기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치 배경 탓에 폰 브라운은 한동안 미국의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의 가슴은 늘 포부로 가득 찼지만 현실은 디즈니에서 아이들에게 로켓 이야기를 들려 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폰 브라운이라는 천재를 놓친 소련은 30년대부터 로켓을 연구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천재 코롤료프를 유배지인 시베리아에서 다시 불러들였다. 그 후 소련은 미국과의 우주전쟁에서 수많은 신기록을 남겼다. 1947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탄두와 로켓이 분리되는 미사일을 개발해 사거리를 1,200km까지 확대했고, 이어서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우주로 보냈으며, 1959년 최초로 인공탐사선을 달에 착륙시켜서 우리에게 달뒷면을 보여주었다.
1961년 코롤료프는 소련 우주인 유리가가린을 세계 최초의 우주인으로 만들었다. 사실 연이은 ‘세계 최초’ 타이틀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얻어낸 것이다. 가가 린의 첫 우주비행은 미국인 앨런 셰퍼드에 비해 23일 앞섰을 뿐이었다.
소련의 강한 압박하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폰 브라운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이미 소련에게 크게 뒤져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코롤료프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나서야 폰 브라운은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1961년 케네디 미국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의 최우선 과제’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렇게 ‘아폴로(Apollo) 계획’이 실시 되었다. 우주경쟁에서 패배를 맛본 미국이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평화로운 시기임에도 전시와 같은 재정과 인적 자원을 동원했다. 나사(NASA)의 예산은 1958년으로부터 3년 만에 약 500% 증가했으며, 그 후 달 착륙 프로젝트가 한창이던 시기에는 3만 4천여 명의 항공우주국 직원과 37만 5천여 명의 산업 및 대학 하청업체 직원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1967년, 폰 브라운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추진기 ‘새턴(Saturn) 5호’를 개발했고, 곧이어 미국의 아폴로 8호가 달 선회 비행에 성공했다.
상업용 우주선 제조와 자원채굴은 더이상 SF소설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
경제적 타당성이 검증된다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소 간 달 착륙 경쟁이 격화되자 소련은 이제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1969년 코롤료프의 ‘유산’인 N1 로켓을 발사했지만, 곧바로 카자흐스탄 초원에 추락하고 말았다. 같은 해 6월, 소련은 다시 달 샘플을 채취하고자 했지만 역시 발사에 실패했다. 이때 미국이 7월에 달 착륙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7월 3일, 소련은 또 다른 N1 로켓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발사와 동시에 발사대와 함께 폭발하고 만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지진파는 미국에서도 감지될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은 포기하지 않고 7월 14일, 프로톤(Proton) 로켓을 이용해 무인탐사선을 발사하였다. 무인 달 착륙이야말로 우주인의 생명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미국보다 먼저 달에 착륙하고자 애썼다.
미국 시간 1969년 7월 20일 22시 56분, 미국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전 세계 5억 명의 TV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폴로 11호’ 우주선을 천천히 빠져 나와 조심스레 왼발을 뻗어 달 표면을 밟으며, 인류는 달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큰 한 걸음이다.’
이 역사적인 발자국은 미·소 우주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길 때, 소련의 무인탐사선은 시속 480km의 속도로 달 표면에 있는 고요의 바다(색이 짙어 바다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에 돌진해 산산조각이 났다. 미·소 우주전쟁은 이렇게 미국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