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LIFESTYLE
2024. 04. 01
온몸의 감각 일깨우며
몰입을 부르는 요즘 전시
미디어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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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유물을 빼곡히 진열하던 과거와 달리, 단 한 점만을 강조하는 전시가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미술관 전시도 조명과 디자인, 영상 등의 기법과 만나 작품을 단순히 잘 보이게 전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공간까지 포함해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변화하는 전시 트렌드를 알아보자.
그림 감상이란 무엇인가? 온통 하얀 벽으로 칠한 갤러리 안에서 숨죽인 채 ‘얌전히 걸려 있는 그림’을 나만의 속도로 보고 느끼는 일, 그림을 그린 화가의 생각과 삶에 나를 조금이나마 중첩시켜보는 일. 수 세기 동안 그림을 본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최대한 동원해 최고로 몰입할 수 있도록 그 스케일과 기술이 모두 확장됐다. 그렇다고 전통적 의미의 전시 감상이 홀대받는 것은 아니다. 2023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은 400만 명으로 역대 최다였고, 리움미술관 등 미술관과 갤러리마다 방문객 수가 최고치를 경신했다.
거리로 나온 예술
미국에서 중남미로 가는 관문인 마이애미. 매년 12월이면 아트 바젤 개막과 함께 도시 전체가 아트위크로 들썩인다. 해변가는 물론 도심 곳곳의 갤러리와 컨벤션 센터, 임시 건물들 안이 모두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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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블루의 외벽을 장식한 JR 크로니클스의 ‘마이애미 벽화’. JR은 도시 곳곳에서 포착한 다양한 이미지를 대형 사진으로 설계해 벽화로 거는 예술가다. ©MiamiArtWeek
지난해 12월 초 시작된 ‘2023 마이애미 아트위크’ 하이라이트를 만든 작가 중 한 명은 JR 크로니클스JR Chronicles다. 5만㎡(약 1만5,000평)의 옛 공장 부지를 개조한 몰입형 전시장 ‘슈퍼블루 마이애미Superblue Miami’의 외벽과 도시의 명품 거리인 디자인 디스트릭트 한편을 초대형 흑백사진으로 뒤덮었기 때문이다. JR은 그라피티 작가로 시작해 도시 곳곳에 대형 사진을 벽화로 거는 사진가이자 행위예술가다. 지난해 아시아 첫 개인전을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열어 국내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다.

마이애미 전시를 위해 JR은 도시 구석구석을 ‘사진관 트럭’을 몰고 몇 달간 돌아다녔다. 주민 1,048명의 얼굴사진을 찍은 후 이들을 결합하고 뒤섞어 작품을 완성했다. 아이들과 평범한 행인, 노인과 셀럽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가는 스케일과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도시 고유의 단면들과 역사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며 관람객과 소통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인 이곳에선 밤마다 작품의 제작 과정이 담긴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물론 음악 파티도 이어졌다.

한때 그라피티는 힙합의 한 요소이자 반항과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JR뿐 아니라 뱅크시, 크래시, 닉 워커, 셰퍼드 페어리 등 전 세계 도시 풍경을 바꿔놓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대형 공공 벽화 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 경매시장과 미술계에서 환영받는 블루칩이 됐다.
예술이 테크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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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Bigger & Closer(not smaller & further)’. ©라이트룸서울
미디어 아트를 기반으로 한 몰입형 전시는 ‘빛의 벙커’, ‘아르떼뮤지엄’ 등으로 많은 이에게 이미 익숙하다. 최근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전시는 기존 전시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올해 86세가 된 ‘우리 시대 최고의 회화 거장’ 호크니는 3년간 직접 이번 작품 제작에 참여했다. 고령임에도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 만큼 디지털과 친한 호크니는 6개 주제로 구성된 전시에 기존 명작들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내레이션과 애니메이션, 작은 요소들을 추가했다.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의 전시장 전체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데, 호크니의 손과 그 손을 따라 그림 속에서 피어나는 꽃 등이 오케스트라 음악에 따라 움직인다. 생존 작가의 목소리와 그의 손길이 닿은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알던 작품을 온전히 새로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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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랩 ‘조각과 삶 사이의 질량 없는 구름’ ⓒteamLab
앞서 언급한 슈퍼블루 마이애미의 사례도 흥미롭다. 이곳은 63년 역사의 뉴욕 갤러리 페이스가 설립한 첫 몰입형 전시장이다. 폭넓고 탄탄한 아티스트 네트워크를 갖춘 세계적 갤러리는 미디어 아트 영역에서도 독보적 힘을 과시하고 있다. 슈퍼블루 안에는 시각과 청각, 촉각과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일으켜 세우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일본 몰입형 아트 그룹 팀랩teamLab의 예술 작품 중 ‘조각과 삶 사이의 질량 없는 구름’은 방수복을 입은 채 전시장에 들어가 휘몰아치는 구름 거품들 사이를 거닐고 만지고 뛰어다닐 수 있다. 구름 위를 걷는 느낌과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공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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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 데블린 ‘우리의 숲’ ⓒEs Devlin
이 전시장의 하이라이트는 무대예술가로 이름난 미디어 아티스트 에스 데블린Es Devlin의 작품이었다. 거울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헤매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화려한 기술만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하며 몰입형 아트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슈퍼블루는 이외에도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한국의 강이연Yiyun Kang과 구정아Jeonga Koo, 일본의 나와 고헤이Kohei Nawa 등 글로벌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작가들과 여러 작업을 함께 하고 있다.
여전히 유효한 명상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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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실 사유의 방에는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만이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예술 작품의 전시 공간이 꼭 모든 감각에 호소하는 화려한 테크닉과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걸 증명한 게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이다.

2년 전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만을 전시한 ‘사유의 방’은 지금까지 13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복도 끝 검은 벽을 따라 들어가면 바닥에 펼쳐진 붉은빛은 지구의 흙을 닮았다. 가느다란 봉들이 끝없이 펼쳐진 검은 천장은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마치 다른 차원의 우주로 우리를 인도하는 전시실이다.

몇백 년간 한 자세로, 고요하게 앉아서 사유해온 이유물들은 관람객이 처음 마주하는 지점에서 약 22m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유물을 보며 사람들이 명상을 할 수 있게 하는 건 반가사유상 자체가 지닌 고유의 힘도 있지만, 공간이 지닌 미묘한 기울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직과 수평 모두 기울기가 있는 공간으로 구성됐는데, 반가사유상으로 다가갈수록 양쪽으로 더 넓게 비어있는 공간들은 눈이 아닌 몸으로 이 공간을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이 공간에 온 사람들의 체류 시간은 꽤 길다. 천천히 걸어 들어와 바닥에 앉아보는가 하면, 한 바퀴 돌아본 뒤 가장 좋았던 자리에서 오래 머물며 다시 들여다보는 사람도 많다.

사유의 방에 대한 열광은 어쩌면 성공적 미디어 아트의 필수 전제 조건이 꼭 더 나은 기술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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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트렌드
글. 김보라(한국경제신문 문화부 차장, 아르떼 콘텐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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