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 대신 출근해줬으면’, ‘나 대신 그 모임에 참석했으면’ 하는 생각 말이다.
“몸이 2개라도 부족해”라는 말을 달고 사는 바쁜 현대인에게 이 바람은 현실 불가능한 이상에 가까웠다. 나를 표현하는 캐릭터 정도였던 디지털 세상의 아바타가 AI 기술을 만나 나와 같은 목소리와 몸짓, 성격까지 똑 닮은 또 다른 ‘나’로 복제된다면 어떨까?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디지털 클론’으로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디지털 클론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결코 병들거나 피로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또 할리우드에서는 더러
미국 배우·방송인 조합SAG-AFTRA에서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면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중단되기도 하는데, 디지털 클론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배우 입장에서도 연기 생명을 늘릴 수 있다. 나이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다작을 할 수 있고, 오래 활동할 수 있으니 수입이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 위험은 디지털이 적용되는 모든 분야에 상존한다. 또 디지털 클론이 배우로 활동하려면 초상권 등 디지털 클론의 권리 보장이 선행돼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디지털 클론을 허용하는 실제 인물의 권리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5월 연예인들이 SAG-AFTRA를 통해 영화사와 방송사를 상대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가 근 4개월 만에 타결됐는데, 여기에 디지털 클론을 이용하는 조건 등도 포함됐다.
2023년 미국 배우·방송인 조합은 디지털 클론 사용 등 처우 개선에 대해 워너 브라더스 사옥 밖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Phil Roeder
국내에서도 이미 실제 인간이 아닌 가상 인간, 즉 버추얼 휴먼이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데뷔한 6명의 소녀로 구성된 걸 그룹 이세계아이돌과 지난해 등장한 5인조 남성 그룹 플레이브다. 컴퓨터그래픽스로 외모를 만들고 신분을 숨긴 사람이 따로 노래를 녹음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각 구성원이 이름까지 갖고 가상 인격을 지닌 채 실제 사람처럼 활동한다. 이들의 팬 동원력을 보면
가상 인간이라고 무시하기 힘들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여의도점에서 약 한 달간 진행한 임시 매장팝업 스토어 행사에 10만 명 이상 다녀가 매출이 평소 대비 7배 이상 뛰었다. 이를 통해 이들의 음반, 기념품 등 각종 상품도 단기간에 50억 원 이상 팔렸다. 또 지난 4월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플레이브의 첫 공연은 예매 시작 10분 만에 매진됐다. 이는 BTS나 아이유 못지않은 인기다.
하이브는 플레이브에 이어 지난 6월 버추얼 아이돌 신디에잇(SYNDI8) 브랜드를 론칭하며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HIVE
업계에서는 사람처럼 늙지 않고 마약이나 스캔들 등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도 가상 인간의 장점으로 꼽았다. 또 남성 아이돌의 최대 고민인 군 입대로 발생하는 활동의 공백 기간도 없다. 이런 이유로 플레이브를 만든 제작사 블래스트는 MBC 사내 벤처로 출발해 분사한 뒤 네이버 관계사 IPX의 투자를 받아 플레이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글로벌 여행사 익스피디아의 배리 딜러 회장은 디지털 클론 시대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디지털 클론이 사람 대신 일하면 주 3일만 일해도 되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여가 활동에 집중하면서 관련 산업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에 대비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미 AI 스타트업 신디시아, 델파이 등에서는 디지털 클론을 개발해 고객 상담이나 팬 미팅 등에 활용하고 있다. 영국 스타트업 신디시아는 AI로 만든 유명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등장하는 말라리아 퇴치 캠페인 영상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이 업체에 따르면 <포천> 선정
100대 기업 중 아마존을 비롯해 55개 기업에서 신디시아의 디지털 클론을 활용하고 있다. 또 신디시아는 세계 최대 AI 반도체 제조업체 엔비디아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9,000만 달러(약 1,246억 원)를 투자받으며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CAA의 알렉산드라 섀넌 기업 전략 개발 책임자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AI 콘퍼런스에서 AI의 잠재력에 대해 밝혔다. ©Fortune Web
델파이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클론 제작 플랫폼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들이 주로 겨냥하는 것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과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다. 델파이는 창작자나 인플루언서가 디지털 클론을 만들어 구독자와 소통하고 인터넷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델파이 공동 창업자 다라 라제바르디안도 외신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디지털 클론을 갖는 시대가 올것”이라며 딜러 익스피디아 회장과 같은 전망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투자받은 AI 스타트업 터치캐스트는 디지털 클론을 앞세워 투자자와 투자 상담을 본격적으로 사업화하기도 했다.
이 업체는 실제 인물의 음성과 표정, 행동까지 그대로 따라 하는 디지털 클론을 1~2분 안에 생성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이용해 터치캐스트의 에도 시걸 CEO는 자신을 닮은 디지털 클론을 제작해 투자 상담을 받았다. 사실상 CEO의 일을 디지털 클론이 대신한 것이다.
팟캐스트, 인터뷰 등에서 발췌한 음성 정보로 사용자의 말과 생각을 모방한 디지털 클론을 개발 중인 AI 스타트업 델파이 홈페이지
디지털 클론은 인간과 AI의 공존 시대를 상징한다. 미국 정부는 디지털 클론 시대를 머지않은 미래의 일로 보고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미국 정부, 공공기관, 업계가 함께 모여 디지털 클론과 공존하는 시대가 되면 산업과 일자리는 어떻게 변할 것이며, 세금부터 복지 제도 등 여러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논의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도 문화체육관광부 등을 중심으로 AI 기술 발달에 따른 저작권 보호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저작권법 등을 정비해 AI 기술의 발달로 일어날 수 있는 저작권 침해 등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디지털 클론이 사회 전반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높이려면 저작권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와 학계, 업계 등이 머리를 맞대고 AI 기술의 진흥과 규제, 윤리적 기준을 논하는 정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