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TREND
2022. 01. 11
세상을 바꾸는
비거니즘의 등장
트렌드의 중심, 비건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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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생활 방식인 비거니즘Veganism, 채식주의 시장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채식비건협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내 채식 인구는 250만 명으로 10년 만에 10배 이상 증가했다. 동물을 사랑해서, 환경을 지키려고, 건강을 위해 등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많은 이가 고기를 먹지 않는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와 함께 이들을 위한 제품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배달 앱이나 식당에서 어렵지 않게 비건 메뉴를 찾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이제는 식생활에 국한되던 이전의 비거니즘을 넘어 일상 속 모든 활동에서 동물성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비건 패션, 비건 화장품, 비건 퍼니처, 비건 자동차 등이 등장했다.
패션, 비거니즘의 철학을 입다
촉감이 부드럽고 광택이 좋아 고급 소재로 사용하는 송치 가죽은 생후 1년 미만의 송아지에서 얻는다. 보통 어미 배 속에서 6개월가량 된 태아를 강제로 끄집어내 피부를 벗긴다. 어린 소가죽일수록 질이 좋다는 이유로 많은 소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는다. 모피와 앙고라토끼털 소재도 마찬가지다. 품질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수많은 라쿤, 토끼, 오리 등 동물이 산 채로 털이 뽑힌다. 이렇게 얻은 소재는 ‘천연’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고급 제품으로 팔려나간다.

먹는 것만큼 동물을 많이 소비하는 곳은 단연 패션계다. 심지어 진짜 동물에서 얻은 가죽과 모피일수록 더 비싸게 팔린다. 가죽과 모피를 얻기 위해 자행하는 동물 착취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비거니즘을 도입한 이유다. 2018년부터 구찌·베르사체·프라다 등의 브랜드는 모피 제품 출시 중단을 선언하며, 과거 동물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하던 모피 퇴출 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세계 4대 패션위크로 꼽히는 런던패션위크에서는 동물 모피로 만든 옷을 금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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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에 성공한 베제아는 와인 생산 시 남은 포도씨, 줄기, 껍질 같은 포도 찌꺼기로 가죽을 생산한다.
디자이너들은 동물 가죽과 모피 대신 새로운 소재를 선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식물성 가죽이 있다. 선인장, 파인애플, 버섯 등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만든다. 멕시코에서 지금 가장 주목받는 패션업체 데세르토Desserto는 선인장을 원료로 사용해 식물성 가죽제품을 만든다. 2017년 각각 자동차와 패션업계에 종사하던 두 개발자가 섬유질이 풍부하면서도 질긴 특성을 가진 선인장을 활용해 만들었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포도 찌꺼기를 이용해 만든 와인 가죽 베제아Vegea, 먹지 않고 버리는 파인애플 줄기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파인애플 가죽 피나텍스Pinatex 등 다양한 비건 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2019년 2월부터 매년 개최하는 LA비건패션위크는 최근 달라지고 있는 패션계의 방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물 소재를 사용하지 않고 파인애플, 사과, 코르크 등 식물성 소재를 이용해 옷과 액세서리를 선보인다. 모델들의 메이크업 역시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만 사용해 비거니즘의 철학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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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피나Pina와 섬유의 굵기를 표시하는 단위인 텍스Tex의 합성어인 파나텍스. 필리핀 농장에서 농업폐기물로 분류하는 파인애플 줄기를 모아 가죽을 만든다.
자동차, 가구도 비건 시대
비건 소재는 패션계를 넘어 가죽을 사용하는 분야라면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특히 탄소중립을 위해 전기차 등 친환경 자동차로 전환하는게 시급했던 자동차업계의 관심사와도 맞아떨어지면서 자동차 브랜드도 비건을 선택하는 추세다.

자동차는 강판이나 알루미늄합금으로만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내부 시트·핸들·대시보드 등 내장재에 동물성 소재를 많이 사용한다. 고급 자동차일수록 가죽 사용량은 더 많아진다. 일례로 롤스로이스의 팬텀 모델은 한 대에 12마리의 젖소 가죽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를 비건 소재로 대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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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의 i3는 대나무와 재활용 소재 등으로 실내를 꾸며 채식주의자의 호평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BMW가 전기차 i3의 도어 패널을 대나무와 재활용 소재로 꾸며 선보인 바 있다. 아욱과 식물인 케나프로 만든 소재도 활용했는데,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이 좋고 미세먼지 원인물질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차 대표 브랜드인 테슬라도 지난해 천연가죽 대신 인조가죽을 선택했다. 100% 비건 전기차 모델 3와 모델 Y를 공개한 이후 모델 X의 가죽 시트를 인조가죽으로 바꾸는 옵션을 추가했다. 재활용 소재를 이용해 동물성 소재 사용을 최소화하기도 한다. 볼보는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재활용 플라스틱 소재를 적용한 XC60 T8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출시했다. 바다에 버려진 그물과 밧줄로 콘솔을 제작했고, 의류업체가 사용하고 남은 면섬유를 재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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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건축가 에바 하를루는 지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양쓰레기나 폐기물, 페트병 등을 이용해 비건 퍼니처를 만든다.
비건 가죽 소재는 우리가 평소 가죽을 사용하는 곳에는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동물 가죽만큼 단단하고 촉감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덴마크 건축가 에바 하를루Eva Harlou는 버려지는 원두 껍질, 맥주 브랜드 칼스버그의 폐곡물, 노보노르디스크의 인슐린 펜을 모아 가구를 제작한다. 멕시코 푸에블라 지역에서는 농부들이 팔고 남은 옥수수 껍질을 납작하게 만들어 독특한 패턴의 타일을 제작한다.

또 사탕수수로 의자를 만들거나, 음식물 쓰레기로 테이블의 마감재로 쓰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른바 비건 퍼니처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착한 소재
수많은 비건 제품은 식물성 가죽을 필두로 한 다양한 비건 소재가 개발되었기에 가능했다. 최근에는 새로운 비건 소재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하다.

메사 추세츠공과대학교MIT 미디어랩 연구팀은 2016년 3D프린터로 가는 섬유를 인쇄하는 기술을 개발해 인조 모피 킬리아Cilllia를 만들어 선보였다. 머리카락 굵기 정도인 50마이크로미터 두께로, 인쇄된 수천 개의 털은 마치 고급 모피처럼 촉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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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메도는 세포조직을 배합하고, 조직을 배양해 제작한 가죽과 육류를 생산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동물을 도축하지 않고 세포에서 가죽을 얻기 위한 연구도 하고 있다. 2018년 미국 생명공학 스타트업인 모던 메도Modern Meadow는 실험실에서 얻은 콜라겐으로 가죽 조아ZOA를 제작했다.

유전자 편집된 효모에서 얻은 콜라겐으로, 여기에는 콜라겐을 만들어내도록 유전자 편집된 세포를 사용했다. 조아는 천연가죽보다 얇지만 강도는 가죽과 비슷하다. 이렇게 만든 가죽은 기존 동물 가죽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80%가량 적고, 합성 소재보다 석유화학 물질은 절반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개발하는 비건 소재 중 가장 상용화에 가까운 기술은 버섯 가죽으로 보인다. 정확히는 버섯에 기생하는 곰팡이 뿌리에서 얻은 균사체로 만든 가죽이다. 미생물 가죽인 셈이다. 지난해 9월 영국 임피리얼 칼리지 런던 재료화학과 연구팀은 곰팡이 균사체 가죽이 동물 가죽과 촉감이 유사하면서도 동물성 소재나 플라스틱보다 탄소중립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실제 버섯 균사체 가죽은 천연가죽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의 100분의 1만 있어도 제작이 가능하다. 또 자연분해 돼 처음부터 끝까지 친환경적이다. 에르메스는 지난 4월, 버섯 균사체 가죽을 이용해 빅토리아 백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상용화를 앞둔 셈이다.

가죽 대용은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되고, 환경문제에 대처할 수도 있다. 균사체 같은 천연 소재로 가죽을 만들면 환경이나 동물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계를 넘어선 성장
비건 시장이 ‘먹는’ 시장이라는 한계를 넘어 계속 성장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평생을 지켜온 식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비건 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건 패션이나 비건 화장품으로 비거니즘에 입문한 뒤 채식으로 범위를 넓히기도 한다. 특히 폭우, 가뭄 등 기후변화가 일상으로 와닿는 요즘 비거니즘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올해 8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제6차 보고서 일부를 공개하며, 지구온난화의 요인이 인간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탄소중립은 필연적인데, 동물착취로 인한 탄소 배출을 비거니즘으로 줄일 수 있다.

실제 비건 가죽은 울이나 알파카 같은 동물성 소재에 비해 히그 지수Higg Index, 의류 소재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환경 부담 요인가 최대 4분의 1 수준으로 낮다. 비거니즘이 환경적으로도 좋은 선택지가 되는 셈이다.
글. 이영애(<과학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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