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내 주방이 사라진다”고 언급하고 배달 서비스 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내스퍼스Naspers의 밥 반 디크Bob van Dijk 회장, “향후 가정에서 음식을 주문해 먹기만 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 스위스 연방은행 등 여러 전문가와 기관에서 주방의 종말을 예측한다. 선사시대 인류가 처음 정착하고 움집 한가운데 불을 피우면서 시작된 주방의 역사는 과연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주방의 고유 기능인 음식을 만드는 일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식품소비행태조사에 따르면, 음식 대부분을 만들어 먹는다고 응답한 가구가 10년 전인 2013년 89.7%에서 2022년 63.2%로 감소했다. 반면 한 달에 1회 이상 온라인으로 식품을 구입한다는 비중은 2013년 8.2%에서 2022년 56.3%로 늘어났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삼시 세끼 반복되는 식사 준비의 수고를 덜어주는 산업의 급성장이다. 음식 배달 서비스는 모바일 앱이라는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형국으로, 통계청이 배달 음식 통계를 기록하기 시작한 2017년 온라인을 통한 음식 거래액이 2조7,000억 원이었는데, 2021년에는 무려 25조7,000억 원으로 연평균 75.1%라는 기록적 성장세를 나타냈다.
또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집밥의 수요는 가정 간편식 소비의 증가를 가져왔다. 2013년 1조6,000억 원이던 관련 시장 규모는 매년 10% 이상 성장을 거듭해 2022년 5조 원을 넘어섰다. 가정 간편식의 성공 원인은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데 있다. 3분요리, 즉석밥 등 편의성을 내세운 1세대는 원물 느낌을 살린 냉장·냉동식품의 2세대로 진화했고, 컵밥과 일품요리 등 다양성을 내세운 3세대를 거쳐 현재는 신선 재료를 활용한 밀키트Meal Kit라는 4세대로 발전했다.
음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서 음식을 만드는 주방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사실 주방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방은 주거 공간 중 가장 큰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주방은 거실과 식당이 통합된 특유의 형태다. 이 공간들의 통합이 놀라운 이유는 전통적으로 전혀 다른 성격과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주방은 거실과 분리돼 있었고, 식당은 별도로 없었다. 마루로 된 거실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된 주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신발을 신어야 했다. 사람들이 식탁 놓을 자리를 원하면서 1970년대 주방과 식당이 결합된 형태가 나타났는데, 신발을 신지 않았지만 여닫이 문으로 거실과 분리한 것이다. 거실과 식당, 주방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가 사라진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현재 주방은 조리와 식사를 위한 기능적 공간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여러 사람이 식탁에 앉아 대화하고 휴식을 취하며 공부, 재택근무, 취미 생활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어린 자녀를 식탁에 앉혀두면 부모는 아이들을 보며 음식을 준비할 수 있다.
주방이 가족 모두가 모이는 소통의 공간, 화합의 장소로 자리매김하면서 4인 이하의 가구에서도 6인용 식탁을 사용하는 비중이 증가하고 있으며, 식탁에서 노트북이나 스마트 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 콘센트를 배선 설계에 반영하고 있다.
후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주방은 거실로 공간을 확대하고 개방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탁 트인 경치와 햇살을 누릴 수 있도록 세대 전면에 주방을 배치하는 사례까지 생겨났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기능적 공간이던 주방이 가족과 소통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중장년 세대는 집 안을 개조할 때 안방이나 화장실보다 주방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바꾸고 싶다고 답했다. 이들이 주방을 주목하는데에는 머무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연구에 따르면 중장년 세대의 경우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주방은 주거 공간 중에서 가장 혼잡한 곳이다. 이는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구가 많기 때문인데, 주방 바닥 면적에서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30~40%나 된다. 아울러 평균 693개나 되는 물품이 주방에 있는데, 주방 가전부터 보관 식품, 식사용품, 보관 비품, 조리용품 등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이에 주방 사용이 빈번한 중장년 세대는 더욱 사용하기 편하고, 효율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길 원한다.
반면 1인 가구를 포함한 20~30대 젊은 세대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SNS에 사진 혹은 짧은 영상으로 올려 지인과 소통하기를 즐긴다. 이에 밝은 조명과 안전 설계, 기능성 높은 디자인으로 주방 공간을 개선하려는 욕구가 크다.
이처럼 오늘날의 주방은 고유한 기능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세대가 함께 살던 과거에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거실이나 안방이었지만, 구성원이 줄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지금은 주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최근 신축하는 아파트 중에는 거실과 주방이 거의 분리되지 않거나, 아일랜드 식탁 등을 활용한 대면형 주방을 설계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변화에는 세대별 주방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한몫한다.
삼성전자의 주방 로봇 ‘삼성봇 셰프’가 요리사와 협업해 시연하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공간으로서 주방의 역할은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주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방은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향후 주택 내에서 가장 혁신적인 공간이 될 전망이다. 주방에 첨단 과학기술을 적용하는 ‘스마트 키친’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냉장고는 글로벌 가전업체가 주목하는 스마트 장비다. 냉장고가 보관하는 음식의 신선도 유무와 식재료의 소비기한을 관리하고, 가까운 마트 할인 정보를 검색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다. 가족 구성원이 섭취하는 음식물을 확인하고, 영양소를 고려해 식단을 제안하는 영양사 역할까지 한다.
불을 사용하는 가스레인지는 실내 오염 걱정이 없고, 높은 열효율로 조리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인덕션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정해진 위치에 올릴 필요 없이 식탁 테이블 위에 냄비를 올리면 냄비와 접한 면의 인덕션 코일만 작동해 조리가 진행된다. 조리하는 냄비 주변에는 요리 방법과 타이머가 떠서 요리를 도와준다.
3D 프린터로 음식물 담을 그릇을 만들 수도 있는데, 먹고 싶은 음식까지 프린터가 만들어주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스마트 키친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로봇 요리사는 5,000여 가지 음식을 요리하고, 요리가 끝나면 스스로 청소까지 할 줄 안다.
“부엌일을 하면 하루에 십 리를 걷는다”는 옛말이 있다. 씻고 다듬기부터 시작해 썰고 자르기, 가열하고 조리하기, 양념하고 간 맞추기, 상 차리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손도 많이 가고 힘도 드는 가사 노동이었다. 스마트 키친의 발전이 기대되는 것은 음식 만드는 일을 힘든 노동에서 즐거운 취미 영역으로 바꿔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