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낯선 세계와 마주한다. 변화를 대하는 방법은 기존 형식을 타파하고 아예 새로운 기준을 만들거나, 이전과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있는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고여 있는 물을 다시 흐르게 하려면 물속의 파동을 일으켜야 한다. 다만 어떻게 파동을 일으킬지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는 스물아홉 살에 ‘불새’, 서른한 살에 ‘봄의 제전’으로 파리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음악가다.
‘봄의 제전’은 1913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할 당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박자와 클래식 악기에서 들어본 적 없던 낯선 소리로 객석의 야유와 고성을 들었다. 그 시대의 비난은 세월이 지나 음악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바뀌고, 오늘날 스트라빈스키는 혁신가로 재평가받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문제적 명작 ‘봄의 제전’ 초연 이후 25년이 지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연한 강의록을 묶어 <음악의 시학>을 출간했다. 강연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전통과의 조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가 완전한 새로움과 형식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기존으로부터의 탈피를 넘어선 재해석, 재창조에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음악의 시학’ 강연 당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나되 주변과의 조화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창조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옴니버스 개발 플랫폼을 만들어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협업할 수 있는 워크플로를 완성했다. 이미지 출처: 엔비디아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는 창조적 파괴의 명암은 ‘메타’와 ‘엔비디아’ 사례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먼저 메타의 사례를 살펴보자. 2021년 10월 페이스북의 창업자이자 CEO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는 17년간 유지해온 사명을 ‘메타 플랫폼스Meta Platforms, 이하 메타’로 변경하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을 통해 소셜 미디어 시장을 지배해온 기업의 대전환을 공표했다. 기존 SNS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괄하는 신사업으로 나아가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사명을 변경하면서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나갔다.
저커버그가 제시한 메타버스의 비전은 VR 헤드셋을 착용한 사용자가 물리적 제약 없는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가상 세계에서 교통 체증 걱정 없이 출근할 수 있다. 날씨의 제약 없이 여행하고 쇼핑하며 콘서트 관람도 즐길 수 있다. 메타버스 속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만남과 경험은 2차원의 활자나 그래픽이 보여줄 수 없는 3차원적 세계이며, 사용자의 상호작용이 시차 없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는 심지어 환경적으로 무해하다.
5년 내 메타버스를 삶의 일부가 되게 하겠다고 공언한 메타이지만,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CNBC에 따르면 2023년 11월 말까지 미국의 VR/AR 기기 시장은 2년 연속 하락하며 전년에 비해 40% 감소했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메타버스를 실현해주는 VR 헤드셋이 비싸고, 무겁고 답답하며 시력 손상이 우려되는 등 사용자가 여전히 불편함을 느낀다는 데 있다. 게다가 체험형 인터넷 세상은 OTT나 영상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보다 다양하거나 흥미롭지도 않았고, 서비스도 다양하지 못했다. 기술혁신에만 집중하면서 메타버스가 궁극적으로 고객에게 제공해야 하는 가치를 제한된 시야로 접근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술혁신은 여러 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파괴적 창조는 혁신과 성장을 이뤄내는 타당한 프레임이다. 하지만 문제와 해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혁신과 파괴라는 틀에 갇히게 되면 프레임 너머 가치 혁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
이제 엔비디아 사례를 살펴보자.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CEO 젠슨 황Jensen Huang은 2021년 11월 ‘옴니버스Omnibus’라는 메타버스 개발 플랫폼을 론칭했다. 세계적 그래픽 칩 메이커 엔비디아에 메타버스 세상은 그래픽 처리장치GPU의 폭발적 수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기회의 무대였다. 특히 메타와 달리 메타버스 산업에서 대두되는 새로운 문제점을 포착해 이를 수요 창출의 기회로 삼은 것에서 명암이 갈렸다.
많은 기업은 AR/VR와 AI 기술을 응용한 가상현실의 시각화, 3D 시뮬레이션 기술을 통해 가상 세계를 구현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현실과 완벽하게 동기화된 가상공간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은 현실의 데이터를 적용해 여러 시나리오를 반복 훈련하거나 모의 실험을 계속함으로써 현실에 가장 적합한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기술 구현까지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과 데이터가 상이했고, 이들이 한 공간에서 협업할 수 있는 플랫폼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엔비디아는 옴니버스라는 개발 플랫폼을 만들어 개발자와 3D 그래픽디자이너가 각자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합하고, 단절되었던 데이터를 연결해줌으로써 워크플로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보장했다.
최근 엔비디아는 AI 기술을 검증할 수 있는 무대로 옴니버스를 활용할 방침이라 밝혔다. ‘어스2Earth2’라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해 옴니버스 플랫폼에 디지털 트윈 지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AI로 수십 년 후 지구 기후를 시뮬레이션하고, 변화와 위기 상황을 예측한다는 가치를 내세웠다.
별마당도서관은 복합 문화 공간과 융합한 새로운 개념의 ‘구경 가는 도서관’으로 혁신을 일으켰다.
기존 형식에서 탈피해 상생의 방법으로 새로운 기준을 창출하는 사례는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코엑스 쇼핑몰에 위치한 ‘별마당도서관’은 구경 가는 도서관으로 차별화하며 새로운 도서관 이미지를 구축했다.
도서관은 조용하고 소장 도서가 많으며 좌석 수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별마당도서관은 인파가 넘치는 쇼핑몰 한복판에 있어 소란스럽고 화려한 조형물과 디자인으로 가득하다. 주 1회 이상 강연 및 행사를 통해 도서관과 문화 공간의 특징을 융합해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켰다.
‘태양의 서커스’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장르만 보여주던 것에서 서커스와 연극, 발레의 장점을 융합해 다양한 관객을 끌어들이며 새로운 서커스 시장을 창출했다.
메타버스라는 신기술의 복합체를 신성장 기회로 삼은 메타와 엔비디아는 다른 관점으로 가상현실을 구현했다. 메타는 현실 공간을 가상 세계에 옮겨 현실의 삶을 대체하도록 기술 개발에 집중한 반면, 엔비디아는 미래의 현실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가상 세계를 만들었다. 메타는 ‘오큘러스Oculus’라는 VR 헤드셋을 기반으로 현재 시장 창출을 도모했고, 엔비디아는 옴니버스라는 컴퓨팅 플랫폼을 기반으로 잠재된 산업용 메타버스 시장 창출을 이끌었다.
두 가지 관점 모두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한 접근법으로 유효하지만, 지속적이고 확장 가능한 가치를 동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누가 왜 그 변화에 맞서고 있는지 돌아보고,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데 그치거나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닌, 상생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