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LIFESTYLE
2023. 01. 31
하얀 그림,
새로운 시작
예술이 전하는 겨울 속으로
img
1월 1일, 새해 첫날, 달력의 맨 앞 장. 우리는 한 해의 시작을 사계절의 마지막인 겨울과 함께 맞이한다. 겨울이 신년의 첫 계절인 이유는 모든 존재가 ‘없음’에서 출발해 ‘있음’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겨울은 세상의 끝이자 기원이다. 온 땅을 새하얗게 뒤덮은 설경은 밝은 미래를 그려나갈 흰 도화지와 같다. 새로움은 언제나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예술이 전하는 새로움의 세계, 겨울 속으로 들어가 본다.
순수한 아름다움
뽀얀 조각구름이 하늘을 헤엄치는 한가로운 오후, 그 구름만큼 새하얀 눈이 조용한 농촌을 복작이게 만든다. 인상주의 풍경화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의 ‘루브시엔의 눈 내린 풍경Snow Effect in Louveciennes. 부모가 영국인인 시슬레는 파리에서 태어나 한평생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모네, 르누아르와 가깝게 지낸 그는 상대적으로 명성을 얻지 못하고 궁핍한 삶을 살다 사후에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부유한 부모 덕에 안락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재정적 지원이 끊기면서 오로지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 시슬레는 파리 근교 센Seine강 하류의 작은 마을 루브시엔에 머물며 동네 풍경을 자주 화폭에 옮겼다. 평화롭던 집안이 한순간 무너지자 시슬레의 삶에도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코끝이 시린 추위, 배고픔에 칭얼대는 어린 두 자녀, 밥값을 위해 팔아야 하는 그림들.

르누아르가 지중해의 샛노란 햇볕에 취해 순수한 기쁨을 그림에 담았다면, 푸른 기운이 감도는 시슬레의 그림은 같은 인상주의 기법에도 온도 차가 아주 크다. 눈밭을 감싸는 햇살은 차분하고 쓸쓸한 공기와 어울려 신비롭기도, 명상적이기도 하다. 그 길의 끝, 무리와 떨어져 홀로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은 왠지 시슬레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잿빛 그늘에 드리워진 시골길을 정처 없이 떠돌며 시린 겨울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img
클로드 모네의 ‘까치’
시슬레와 동시대에 활약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도 청년기에 설경을 탐닉했다. 그가 남긴 겨울 풍경화만 140여 점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날 인상주의의 대가로 칭송받는 모네도 한때는 춥고 험난한 시기를 보냈다. 시슬레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다 죽음을 생각하고 강물에 뛰어든 순간도 있었다. 젊은 시절 모네가 그토록 빛에 몰두한 이유는, 삶이 얼어붙지 않도록 손잡아줄 단 한 줄기 빛이 절박했기 때문은 아닐까.

모네의 겨울 그림 중에서도 걸작이라 칭송받는 ‘까치La Pie’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에트르타Etretat 마을에서 그린 대형 유화 작품이다. 하나의 빛줄기가 설원을 비추듯, 이 시기 모네의 삶에도 부유한 후원자 루이 조아킴 고디베르Louis-Joachim Gaudibert가 찾아왔다. 고디베르는 모네에게 그림 제작을 의뢰할 뿐 아니라 에트르타에 집을 마련해 그의 가족이 편히 지내도록 도왔다. 어느 겨울 눈보라 치는 풍경을 포착한 이 그림은 크림색으로 뒤덮인 하늘과 땅, 둔덕 아래 살포시 내려앉아 낮잠을 청하는 듯한 보랏빛 그림자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고요하고 적막한 화면 귀퉁이, 곧 몸부림치며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 같은 귀여운 까치가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총천연색 설경
시슬레와 모네의 그림은 겨울 농촌이 보여주는 전형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바람 따라 흩날리는 눈발과 뿌연 대기, 소복이 내려앉은 함박눈에 색채가 사라진 땅의 피부. 그러나 모든 겨울 풍경화가 무채색으로 일관되지 않는다. 다채로워 더욱 빛나는 설경도 있다. 먼저 러시아의 대표적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Boris Kustodiev, 1878~1927는 서리가 잔뜩 내린 어느 오후의 작은 마을을 선명한 빛깔로 묘사했다. 그는 ‘서리가 내린 몹시 추운 날Frosty Day에 매서운 겨울날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을 친근하게 담아냈다. 경주용 썰매를 타고 달리는 일꾼과 그 뒤에 앉은 중산층 부부, 방한복을 입고 힘차게 빗질하는 청소부, 나뭇가지마다 솜사탕처럼 매달린 흰 눈과 러시아 전통 건축물….
img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서리가 내린 몹시 추운 날’
쿠스토디예프는 1905년 러시아혁명 당시 전체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생한 캐리커처로 재현하곤 했다. ‘서리가 내린 몹시 추운 날’의 화면을 압도하는 붉은 태양은 그러한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러시아의 엄동설한에도 꿋꿋이 고개를 치켜들고 마을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햇살, 그 빛을 받은 풍광은 밝고 화사한 색채와 활기로 가득하다.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 행복, 즐거움, 조국의 평화를 바라는 염원이 겨울 풍경에 담겨 있다.
quote_base_before
쿠스토디예프는 1905년 러시아혁명 당시 전체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생한 캐리커처로 재현하곤 했다.
작품의 화면을 압도하는 붉은 태양은 그러한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quote_base_after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눈 내린 풍경Landscape with Snow도 알록달록한 컬러로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마 희끗희끗 눈 부스러기들이 없었다면 봄이나 가을에 더 가까운 풍경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은 겨울이 거의 끝나가는 2월 중순에 그렸기 때문이다. 고흐는 파리 예술계에 환멸을 느끼고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1888년 아를Arles로 떠났다. 남부 도시로 요양하러 온 그는 기록적 한파로 혹독한 날씨를 견뎌내야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눈이 녹아가는 마을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img
빈센트 반 고흐의 ‘눈 내린 풍경’
그가 자살하기 2년 전에 완성한 이 그림은 고흐의 화풍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제작된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특히 이 그림은 고흐가 열렬히 수집한 일본 판화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하며, 짙은 녹색과 고동색 그러데이션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관습도 묻어난다. 톡톡 튀는 색감과 함께 화면을 역동적으로 구현하는 요소는 대각선 구도다. 일반적으로 네덜란드 풍경화가 하늘을 파노라마로 넓게 조망한다면, 고흐는 자신이 서 있는 곳과 멀리 보이는 붉은색 지붕 오두막 사이의 지형에 더욱 집중했다.

관객의 시선은 한적한 길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한 남자와 그 옆의 갈색 개에게로 향한다. 일반적으로 하늘은 이상, 땅은 현실의 메타포로 해석되곤 한다. 원대한 꿈을 품고 파리로 떠났다가 결국 아를로 돌아온 고흐는 이 작품에 어떤 심정을 녹여냈을까.
도시에 내린 눈꽃
이제까지 살펴본 그림은 모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겨울 풍경이다. 자못 명상적이기까지 한 이들 작품 앞에서 우리는 따뜻한 실내에 앉아 먼 지평선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면 화가가 재현한 도시의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 도시가 주요한 생활 무대인 현대인에게 겨울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이지만, 눈 쌓인 도심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미끄러운 인도, 매연과 뒤섞여 질척질척한 도로, 차와 사람이 한데 얽혀 복잡한 길가.
img
폴 시냐크의 ‘눈 내린 클리시 거리, 파리’
폴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겨울 일상을 선사한다. 먼저 시냐크의 ‘눈 내린 클리시 거리, 파리Snow, Boulevard de Clichy, Paris를 보자. 시냐크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파리의 어느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우산이나 모자로 눈발을 막아내며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펜으로 그린 드로잉처럼 유쾌하게 거리를 잠식한다. 그 위로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나뭇가지가 지면과 대칭되면서 안정적 구도를 이룬다. 이 그림을 더욱 발랄하게 만드는 포인트는 작은 점들이다.

시냐크는 모네의 그림에 감명받아 화가의 길을 선택한 이후 빛과 색채 연구에 몰두하면서 점묘주의로 나아갔다. 과학적 엄숙함을 중시하던 점묘법에서 감정적 가치를 극대화해 강렬한 색조와 풍부한 색채감을 실험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이 작품 역시 서정적 점묘법이 두드러진다. 방금 막 땅에 떨어진 하얀 눈, 누군가 밟고 지나간 고동빛 눈과 건물 위 눈송이까지. 시냐크가 붓끝을 콕콕 찍을 때마다 캔버스에는 올망졸망한 눈꽃이 피어난다.
img
카미유 피사로의 ‘겨울 아침 몽마르트의 거리’
피사로의 ‘겨울 아침 몽마르트의 거리The Boulevard Montmartre on a Winter Morning도 파리의 겨울을 담았다. 몽마르트의 한 호텔에서 늦겨울 아침을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전면에 보이는 대상을 또렷하게 채색하고 뒤로 갈수록 뿌옇게 처리해 원근법을 적용했지만, 전반적으로 명확한 묘사보다 순간의 인상에 집중했다. 모호한 윤곽선으로 거칠게 구현한 사람들은 모두 바쁜 출근길에 정신없어 보인다. 100여 년이 훌쩍 지난 그림이지만, 여전히 지금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변화하는 날씨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분주한 사람들. 다만 그들과 다른 속도로 도시를 조망하는 나뭇가지에는 새순이 돋아날 준비를 마치고 있다. 또 다른 계절은 바로 이 끝에서부터 피어날 것이다. 얼어붙은 눈을 모두 쓸어낸 다음에야 그 땅에서 봄꽃이 자라듯, 겨울은 우리가 새로운 한 해를 위해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이다.
클릭하시면 같은 키워드의 콘텐츠를 모아볼 수 있습니다.
#예술 #계절 #VIP
글. 이현(<아트인컬처> 수석기자)
COPYRIGHT 2021(C) MIRAE ASSET SECURITIES CO,.LTD.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