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LIFESTYLE
2022. 08. 16
'수박빛'
여름 명화
풋풋한 계절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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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상징, 수박의 묘미는 ‘여럿’에 있다. 큼직한 수박 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한 조각씩 베어 물 때마다 빨간 여름이 배 속으로 시원하게 퍼진다. 그 추억을 담은 명화도 마찬가지. 눈부신 해변, 휴양지, 울창한 산림, 피크닉 풍경 등을 포착한 명화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한 풋풋한 계절을 떠올리게 된다. ‘수박빛’이 눈부시던 그해 여름을.
여름을 상징하는 짙푸른 바다
바다는 두 얼굴을 지녔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한 얼굴, 모든 존재를 집어삼킬 정도로 두려운 얼굴. 해변과 가까운 물결이 스카이블루로 반짝이며 부드러운 심상을 일으킨다면, 까마득한 심해는 미지의 경외심과 멜랑콜리 정서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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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54호 선실의 승객’.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 1863~1923의 ‘해변에서의 산책Walk on the Beach’(1909)과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54호 선실의 승객The Passanger from Cabin 54’(1895)을 나란히 놓고 보자. 먼저 우리에게 더 익숙한 장면은 툴루즈로트 레크보다 소로야의 그림이다. 복고풍으로 빼입고 기념사진을 찍으러 나온 여자 친구들은 10초 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된 사진처럼 현대적이다. 눈을 콕콕 찌르는 태양과 바다 짠 내를 싣고 오는 살랑바람, 하얀 거품이 보글대는 파도…. 비록 모래밭을 바위처럼 단단히 딛고 선 구두가 옥에 티이긴 해도 무더위를 날리는 청량감이 화면 가득 맴돈다.

소로야의 그림은 작품 제목 그대로 평화롭고 안전하다. ‘해변에서의 산책’. 이곳의 바다는 사람을 전혀 위협하지 않고, 더불어 관람객도 그림을 보며 언젠가 해수욕장에서 보낸 한때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다. 굳이 해외가 아니어도 동해, 서해, 남해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닐던 기억이 해풍처럼 불어와 솜털을 간질인다. 소로야에 비하면 툴루즈로트레크의 그림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54호 선실의 승객’이라니 흡사 여름철 납량 특집물의 제목 같기도 하며, 여인이 낀 붉은 장갑이 피처럼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두 그림은 제목뿐 아니라 구도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우선 소로야는 캔버스를 땅과 바다로 나눠 그 중간에 인물을 배치했는데, 균형이 잘 잡힌 땅 덕분에 사람은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툴루즈로트레크의 그림은 얇은 대각선이 중심을 이룬다. 화면의 절반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의자 프레임, 먼 수평선조차 위태롭게 옭아매는 선박 철제 난간, 심지어 의자의 천과 여인이 입은 치마까지 가느다란 선이 주를 이룬다. 흔들리는 구조에 정점을 찍는 주인공은 관람객을 뒤로한 채 사색에 잠긴 인물.

너스레 인사를 건네볼 법한 소로야의 여인들과 반대로 이 승객에게는 말 걸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했는지, 자녀 교육 문제가 고민인지, 아니면 그저 뱃멀미에 시달리는 중인지 슬며시 추측만 해볼 뿐이다. 이 장면을 멀리서 잠자코 지켜보는 바다는 여인의 고독을 색깔로 형상화한 듯하다. 끝없이 깊어지고, 끝없이 넓어지는 푸른 심연. 블루는 ‘심리의 색’ 아니던가. 무, 영원, 허공을 지향하는 정신의 색.

‘54호 선실의 승객’은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은 제목, 여인의 열린 시선, 무한히 펼쳐지는 바다 등으로 긴장감이 넘치는 동시에 진실을 알 듯 말 듯 해서 매력적이다. 참고로 소로야와 달리 툴루즈로트레크는 평생을 신체장애로 멸시받다 매독에 걸려 요절한 불우의 화가였다.
여름을 더욱 여름답게, 정열의 꽃
화가는 꽃을 사랑한다. 맞는 말일까? 꽃이 회화의 단골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이후다. 하지만 꽃이라는 생물 본연을 탐미하기보다 꽃 같은 무언가를 은유하는 목적으로 주로 쓰였다.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 꽃처럼 향기로운 청춘, 꽃처럼 금세 시드는 삶의 허무함, 꽃처럼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

화가는 꽃을 그리면서 경탄하고(“불그스름한 꽃봉오리가 수줍은 소녀의 뺨과 같구나!”), 탄식했다(“어제는 피고 오늘은 지는 꽃송이여, 너는 우리네 인생과 판박이구려. 흘흘”). 다시 말해 화가는 ‘꽃으로’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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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해바라기’.
해바라기를 그린 화가라면 국내에서 이인성, 해외에서 반 고흐가 금방 떠오르지만,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도 해바라기 핀 정원을 화폭에 담았다. 꽃 한 송이가 애처롭게 고개를 떨군 ‘해바라기Sunflower’(1907). 그의 명작 ‘키스’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열정적으로 입맞춤하는 인물을 닮은 듯한. 그래서일까, 해바라기는 혼자여도 적어 보이지 않고, 시들어가면서도 내면의 힘이 넘친다. 샛노란 고집과 결기로 하늘까지 손을 뻗었다가 관능적인 태양 빛에 흠뻑 취해 흙으로 돌아가는 자태는 한여름의 뜨거운 사랑을 연상시킨다.

한편 정사각은 가로와 세로가 딱 맞아떨어지지만, 화면 비율로서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 인간의 눈에는 정사각보다 편안한 구도가 직사각이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훑는 흐름이 균형 감각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클림트의 ‘해바라기’와 ‘키스’는 모두 진흙을 걷어내고 피어난 찬란한 꽃 같다. 불안한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황홀한 결실을 맺은 존재들에 우리는 기꺼이 흔들리고 유혹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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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마케의 ‘목욕하는 소녀들’.
클림트의 꽃에 인간이 숨어 있다면,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1887~1914는 ‘목욕하는 소녀들Bathing Girls with Town in the Background’(1913)에 꽃씨를 심었다. 마케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27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10년의 짧은 활동 기간 동안 표현주의·미래주의·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청기사파 등 다양한 스타일을 섭렵했다. 사망 2년 전 마지막으로 흠모한 유파는 오르피즘Orphism. 쉽게 말해 색채의 다이내믹한 힘으로 캔버스에 음악을 창조하는 양식이다.

구체적 형상에서 멀어져 순수한 색의 형태로 시각적 리듬과 운율을 조성하는 예술실험. ‘목욕하는 소녀들’도 소녀들이 숲에서 발가벗고 있는 장면에서 출발했겠지만, 그 결과는 현실 재현에서 벗어나 색면의 감각적 재배치로 완성했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고동색 나무껍질의 견고함, 싱싱한 나뭇잎의 초록 곡선, 인간 피부의 명암과 단단한 근육이다. 즉 클림트가 꽃에 인간론을 투영한다면, 마케는 인간에서 출발해 자연물의 색과 형태에 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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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꽃을 사랑한다.
하지만 꽃이라는 생물 본연을 탐미하기보다
꽃 같은 무언가를 은유하는 목적으로 주로 사용했다.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 꽃처럼 향기로운 청춘,
꽃처럼 금세 시드는 삶의 허무함, 꽃처럼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
화가는 꽃을 그리면서 경탄하고 탄식했다.
다시 말해 화가는 ‘꽃으로’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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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추억하는 놀이들
아이와 어른의 사회에서 다른 점은 ‘종’이다. 아이는 종이 울리면 놀이하고, 공부하고, 멈추고, 움직인다. 누군가 정해놓은 스케줄에 따라 규칙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어른의 세계에는 종이 없다. 대신 각자가 알아서 채워야 할 텅 빈 시간표만 있을 뿐이다. 이 시간표의 이름은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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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에두아르 발로통의 ‘공’.
펠릭스 에두아르 발로통Felix Vallotton, 1865∼1925의 ‘공The Ball’(1899)은 중앙선을 경계로 빛과 그림자가 나뉜다. 동남쪽에는 빨간 공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가 햇살 아래 놓여 있다. 캔버스 밖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놀이에 몰두한 모습이다. 반면 북서쪽은 짙푸른 어둠에 눌려 있다. 입 막고 눈 감긴 채 섬뜩한 일을 벌일 것 같은 죽음의 신 타나토스Tanatos가 아이를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한 손을 뻗는 듯하다. 이곳의 주인은 멀리서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어른들. 이들은 아이의 자유에는 아랑곳없이 언제든 명령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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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
조르주 피에르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가 강가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을 담은 그림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Bathing at Asnieres’(1884)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은 ‘흑화’한 소년이다. 너무 오래 놀아서 피곤한 기색인지, 혹은 부모 손에 이끌려 억지로 끌려왔는지 모르겠으나 물장난에는 영 흥미가 없어 보인다. 그 앞으론 놀러 나와 신나는 기분에 환호성 지르는 어린아이, 뒤로는 따분한 표정으로 저녁 뭐 먹지 고민하는 듯한 어른이 대치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간이 흐르는 인간의 성장기를 빗대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가운데 인물은 마냥 어리지도, 어엿하게 성장하지도 않은 사춘기 과정이겠다. 떠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경계인이자 이방인. 마치 두 계절이 양립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환절기의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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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현(<아트인컬처>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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