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것, 할 것, 즐길 것이 넘치는 시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 얼마나 밀도 있게 사용하는지가 경쟁력이 되었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경제 개념이 바뀌면서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시성비’가 각광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감성이 지난 5년 새 일본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일본 광고 회사 하쿠호도 생활종합연구소가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조사한 결과, 생활 리듬의 고속화를 요구하는 비율이 1999년 37.4%에서 2019년 57.4%로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 빨리’를 요구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의 가성비, 즉 시성비를 따지는 현상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출판 분야에서는 비즈니스 서적 한 권을 10분으로 요약해 읽어주는 정기 구독 서비스가 등장했다. 월 구독료 2,200엔인 ‘플라이어’ 회원 수는 2019년 50만 명에서 2022년 100만 명을 넘어섰다. 식료품 분야에서는 포장지를 뜯자마자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닛신식품이 선보인 ‘0초 치킨라멘’이 출시와 동시에 매진됐다. 0초 라멘의 인기에 힘입어 닛신식품은 즉석 면뿐 아니라 즉석 컵밥, 스무디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시킨 ‘완전 메시(완전한 밥)’ 시리즈를 내놨다.
무엇이 일본의 젊은 세대를 시성비에 집착하게 만들고 있을까?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대표 칼럼니스트 나카무라 나오후미는 이런 시성비 현상을 “디지털 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만든 동시에 바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젊은 세대가 유독 시성비에 집착하는 이유로 “시간이라는 자원을 조금이나마 유효하게 사용함으로써 남들보다 빨리 성장해 안심하고 싶다는 의식이 강한 세대”라고 메이지 대학교 상학부 후지타 유이코 교수는 설명했다.
(좌)‘빨리빨리’ 열풍이 불고 있는 일본에서는 책 한 권을 10분으로 요약해 읽어주는 ‘플라이어’ 앱 서비스가 등장했다.
(우)물만 부으면 바로 요리가 되는 닛신식품의 ‘0초 치킨라멘’은 젊은 층의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OTT가 TV 시장을 지배하기 전, 명절 연휴가 되면 특선 영화 편성표는 필수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요즘 잘 못 듣는 말이 또 있다. ‘본방 사수’, ‘생방’이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간의 효율성을 따지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유튜브, 숏폼, OTT 등의 영상을 배속으로 시청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VOD 시청자 10명 중 4명은 ‘몇 배속’ 모드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LG유플러스 발표에 따르면 정상 속도보다 빠르게 보는 고객 비율이 29%에 달했다. 유튜브 공식 블로그 계정 속 ‘사용자들이 재생속도를 이용해 비디오를 보는 방법’에 따르면 재생속도를 조절하는 시청자 중 1.5배속으로 영상을 보는 시청자가 가장 많았다.
또한 특정 노래를 130~150% 정도 빠르게 돌리는 이른바 ‘스페드 업Sped Up’ 버전도 인기를 얻고 있다. 1분 내외의 숏폼 콘텐츠에 평균 3분 정도의 음악을 맞추다 빨리 돌린 버전이 각광받는 것이다.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 엑소의 ‘첫눈’ 스페드 업 버전 음원 챌린지가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쓰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음악 속도도 가속으로 돌려버린다.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위)와 엑소의 ‘첫눈’(아래) 스페드 업 버전 음원 챌린지는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이러한 시성비 현상은 ‘편리미엄’에서 시작되었다. 2020년 주요 소비 트렌드로 자리한 편리미엄은 삶을 더욱 간편하게 만들어주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가령 스마트폰을 통한 빠른 결제 시스템이나 간편식, 원터치 주문 등이 이에 속한다. 어느새 경조사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계좌 번호가 등장하고, 간편식을 파인다이닝처럼 꾸미고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을 돈처럼 아끼는 사회 현상은 중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게으른 사람을 위한 경제’란 뜻의 ‘란런懶人경제’다.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소비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비 현상을 뜻하는 신조어다. 즉석식품, 대신 장보기 서비스, 편의점 음식, 오디오북, 배달 음식, 로봇 청소기, 식기세척기, 펫 시터, 가사 대행 서비스 등이 모두 란런 경제의 결과물이다.
효율을 생각한다는 것은 노력을 들인 만큼 성과를 기대한다는 의미다. 이는 곧 실패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성비 시대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값진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에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의 선택에 집중하고, 제품의 리뷰나 전문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인다. 특히 소비 면에서 가장 최적화된 선택지를 추구한다.
미국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종류의 온라인 기프트 카드. 온라인 쇼핑 콘텐츠가 점점 많아지면서 인플루언서처럼 먼저 경험해본 사람의 조언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포모FOMO 사피엔스> 저자 패트릭 맥기니스Patrick McGinnis의 말처럼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실패를 회피하려 한다. 맥기니스에 따르면 아마존에서 신발 끈 하나를 구입하려고 해도 2,000개가 넘는 상품이 검색되고, 스타벅스에서 갖가지 조합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음료의 종류는 8만 개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옵션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하고, 최종 결정까지 더 오랜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이에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을 추종하고, 그들의 리뷰를 압축적으로 배속 시청하거나 큐레이션해주는 서비스를 찾는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이 있다. 시간의 속도를 높였다고 해도 그 잉여로 얻게 된 시간은 똑같은 일을 하면서 쓰게 될 가능성이 높다. 동영상을 배속 시청했을 때 계속해서 다른 영상을 배속 시청하는 것과 같다.
독일 예나대학교 사회학 교수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저서 <소외와 가속>에서 휴대폰 탄생 이후 버전이 업그레이드될수록 일상생활에서 빠른 서비스를 통해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그로 인해 삶의 피로도가 함께 높아 진다고 바라보았다. 한시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보다 많은 것을 빨리 흡수하기 위해 시간을 분초 단위로 활용하는 시성비 시대.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열정과 일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현명함도 중요하지만, 각자에게 맞는 속도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은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면 다시 정속에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속담 중에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이 있다. 서두르다 보면 급정거하는 일도 잦아지기 마련이다. 급하게 시간을 압축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나에게 맞는 ‘정속’을 찾아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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