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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07
여전히 뜨거운
K-힙
K-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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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힙’한 것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낡고 오래된 것으로만 여기던 전통문화는 이를 새롭게 향유하려는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세상에 없던 ‘Old but New’로 다시 등장해 유례없는 인기몰이 중이다. 시대의 변화와 세대의 관심에 따라 일상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는 전통문화의 변주를 만나보자.
K-컬처에 매료된 글로벌 브랜드
최근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글로벌 기업들의 관심이 뜨겁다. 명품 브랜드는 각국의 문화유산 보존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이는 장인 정신과 전통을 가치 있게 여기는 브랜드의 철학과도 맞물려 있다. 샤넬은 2022년부터 매년 여러 국가의 전통 문화예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무형 문화유산 장인과 공예가를 선정해 전시를 열고 있다. 한국 공예 후원 사업에 헌신하는 재단법인 예올과 5년간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예올×샤넬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예(올해의 장인)’, 현재와 미래를 잇는 ‘올(올해의 젊은 공예인)’을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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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가 후원하는 궁궐 복원 사업 일환으로 제작되는 ‘화조도’와 ‘원후반도도’ 모사도가 전시될 경복궁 교태전 내부 ©국가유산청
에르메스는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과 업무 협약을 맺고 2015년부터 조선 궁궐 복원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 5월부터 조선 시대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돌본 경복궁 사정전에서 아침 회의 중 사용한 용교의(의자)와 용평상(임금이 집무를 볼 때 앉던 평상)의 재현품을 전시 중이다. 구찌는 경복궁에서 열린 패션쇼를 계기로 2022년 국가유산청과 한국의 문화유산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사회 공헌 활동 업무 협약을 맺고, 3년간 경복궁 보존 관리 등에 후원금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8개월 동안 조선 고종 때부터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교태전에 걸려 있던 ‘화조도’와 ‘원후반도도’의 모사도를 제작해 교태전 내부 벽면에 설치하고 연말에 공개할 예정이다.
굿즈를 통해 본 K-힙의 인기
앞서 말한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행보는 최근 급부상하는 ‘힙 트레디션Hip-Tradition’과도 연관 있다. ‘힙 트레디션’ 은 유행을 일으킨다는 ‘힙Hip’과 전통을 뜻하는 ‘트레디션Tradition’이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로,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로 자리 잡는 걸 뜻한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힙하게 즐기는 ‘K-힙’의 열기는 여러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전통문화 굿즈를 통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월 한국문화재재단이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협업해 출시한 덕수궁 굿즈 ‘오얏꽃 오일 램프’ 세트를 포함한 5개 상품은 1,000개의 물량이 출시 3일 만에 동이 나 추가 제작에 들어갔다. 힙 트레디션의 대표 주자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 역시 1년 새 매출 규모가 30%나 증가했다.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고려청자 시리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적 굿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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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고려청자를 베이스로 한 텀블러와 물가 풍경 커피잔, 디저트 접시, 유리 저그 등의 굿즈를 공개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2 한국문화재재단에서 공개한 덕수궁 문화 상품은 출시하기가 무섭게 품절되는 등 높은 인기를 보여주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서울관광재단은 지난 6월 서울시 공식 관광 기념품 ‘서울 굿즈’를 새롭게 선보이고, 종로·명동·광화문에 ‘서울마이소울샵’을 개관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두터운 팬덤을 가지고 있는 홍원표, 아트놈, 이사라 등 아티스트 3명과 협업해 선보인 굿즈는 작가 각자의 대표 캐릭터뿐 아니라 해치, 경복궁 등 서울 상징물부터 무궁화, 족두리, 부채 등 전통 물건까지 한국적 요소로 가득하다.

국내 게임업체 넥슨은 넥슨재단이 추진하는 문화예술 지원 사업 ‘보더리스Borderless’의 일환으로 국가유산진흥원과 ‘보더리스-크래프트Craft판’ 사업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전통문화 굿즈 개발 협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전통 공예품 제작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무형유산 전승자들이 맡고 넥슨은 자사가 가지고 있는 게임 지식재산권을 제공한다. 무형유산 전승자는 새로운 자극과 문화를 알리는 창구를 얻고, 게임업계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잠재고객을 유치할 수 있다.
융합이 가져온 시너지 효과
이렇게 전통문화 관련 기관에서 앞다투어 내놓는 굿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굿즈는 기념품에 가까웠다. 문화유산의 크기만 축소해놓은 듯한 미니어처이거나 스토리를 알 수 없는 공예품, 특색 없는 문구류 등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K-컬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문화 취향이 확고한 젊은 수요층이 대폭 늘어나면서 기념품의 범위는 요즘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품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무선 이어폰 케이스나 유리잔, 캠핑용품, 스티커, 열쇠고리 등 다종다양한 품목들이 K-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더 나아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각종 문화재나 전통 문양 등의 데이터를 무료로 개방해 문화 상품 기획자나 디자이너들이 저작권 걱정 없이 다양하고 참신한 전통 굿즈를 개발할 수 있게 장벽을 없앤 것도 유효했다.

물론 K-팝 아티스트들이 앞장서서 SNS 등에 한국 미술이나 전통과 관련한 피드를 올리거나 한복을 무대의상으로, 한옥을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삼는 활동도 유행에 영향을 주고 있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은 K-컬처를 전 세계 한류 팬덤이 함께 즐기는 인류 공통의 문화 코어로 만드는 데 최적의 촉매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K-컬처가 지금의 음악, 미술, 음식, 드라마, 예능 등을 넘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K-컬처를 즐기는 과정이 곧 새로운 K-힙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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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은
K-컬처를 전 세계 한류 팬덤이 함께 즐기는
인류 공통의 문화 코어로 만드는 데 최적의 촉매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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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백화점 풍경까지 바꾸는 힙 트레디션
K-힙 열풍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국의 전통시장이 새로운 포토 존 및 관광 명소로 탈바꿈하면서 지역 전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니 지자체도 이들의 기호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약과와 흑임자 음료, 대추·밤 디저트류의 유행에 이어 요즘은 고려 시대 음식 개성주악이 뜨거운 ‘오픈 런’ 아이템이 되었다. 키워드 분석 사이트 썸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한 달 동안 개성주악에 대한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624.54% 급증했다. 시중에서 유행하는 식음료 및 디저트류 업체를 영입하는 데 총력을 다하는 백화점 지하층에서 유독 2030 세대가 줄을 길게 선 곳은 대부분 뉴트로 입맛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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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과 중 하나인 개성주악의 인기가 급부상하는 등 힙 트레디션은 디저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Kurly
전문가들은 K-힙의 인기가 ‘가심비’와 ‘미코노미(개인의 취향·가치·경험을 중시하는 소비 행태)’를 중시하는 현상과 맞물려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K-힙을 즐기고 친구들과 인증샷을 찍은 후 해시태그를 붙여 타인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모두 한국의 전통문화를 향유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전통문화를 스스로 찾아 즐기면서 편안함과 친근함을 느끼다 보면 좀 더 깊게 즐기고, 오래 즐길 방법을 궁구窮究하고 개발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힘을 얻고 뻗어나가는 문화이기에 지금의 K-힙 현상이 ‘새로운 전통’으로 거듭나는 날도 곧 오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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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취미/취향 #글로벌
글. 홍지수(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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