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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1. 06
워라밸, 워라블, 워라하!
일과 삶의 시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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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기기와 AI의 발달, 여기에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재택근무, 자율 근무 방식으로 인해 일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일과 삶을 보는 관점도 ‘일과 삶의 균형’에서 ‘일과 삶의 적절한 조화’란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100세 시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일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삶의 태도에 대해 짚어본다.
일과 삶의 딜레마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는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일 것이다. 육아 전문가들은 이것은 좋지 않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에게도 이런 불편한 딜레마와 같은 질문이 있다. “일이 중요해? 삶이 중요해?”.
일명 워라밸Work-Life Balance과 관련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한때 밀레니얼 세대에게 가장 뜨거웠던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는 워라밸이었다. 워라밸은 ‘일과 삶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이 둘 간의 균형을 강조한다. 이 개념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처음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여성 운동가들이 직장과 가정의 역할을 조화롭게 유지하려는 필요성을 강조하며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이 시기에 기술 발전과 함께 노동 강도가 높아지고, 직장과 개인 생활 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 중반 ‘워라밸’이라는 줄임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직장 내에서 과도한 근무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워라밸 열풍은 업무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소비 트렌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일과 삶을 정말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이 강조된 개념이지만 이를 잘못 적용했을 경우 조직보다는 개인의 삶만을 생각하는 개념이 되기도 한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 역시 한 인터뷰에서 “워라밸을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밝히며 일과 삶은 실제로는 하나의 원Circle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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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워라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혀 화제가 되었다. ©한경DB
워라밸 대신 워라블과 워라하
‘일과 삶은 구분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워라블Work-Life Blending’과 ‘워라하Work-Life Harmony’이다. 일과 삶의 확실한 분리를 강조하던 워라밸 대신 일은 즐겁게 하고, 휴식은 생산적으로 하는 워라블이 강조되는 시대가 왔다. 워라밸이 직장과 개인 생활을 철저히 분리하고 균형을 맞추려는 접근이라면, 워라블이나 워라하는 일과 삶의 경계를 엄격히 나누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일과 개인 생활이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일과 삶이 자연스럽게 블렌딩 되는 만큼 워라밸보다 더 큰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일상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삶 전체가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태도로 일을 중심에 놓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이 워라블이다. 워라블의 본격적인 확산에는 팬데믹으로 촉발된 재택근무, 유연근무제, 화상회의 등이 있다. 워라블은 일하는 시간과 일하는 공간을 개인이 선택한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할 때 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일하는 방식에 자유를 느끼면, 사람은 그 일을 단순히 생계유지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 일에 대한 강박이 약해지면서 일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늘어나는 것이다. 일과 자기 계발을 연구하는 커리어 전문가들이 워라밸보다 워라블이나 워라하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의 의미와 가치 변화
100세 시대를 살아가며 일에 대한 가치관과 고민은 더 이상 젊은 세대에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과거 5060세대에게 일은 주로 생계유지와 안정된 직업을 중심으로 한 개념이었다. 당시에는 하나의 직장을 선택해 평생 동안 일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현대의 5060세대는 일의 목적이 단순한 경제적 수단을 넘어서 자아실현, 삶의 의미, 그리고 사회적 기여와 같은 더 넓은 가치로 확장되었다.
이 세대는 은퇴 후에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창업하거나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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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 국가에서 퇴직 연령이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고령화와 고용Aging and Employment 2023’ 보고서에 따르면 OECD 국가 전반에서 평균 은퇴 연령이 상승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닌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많은 중‧장년층이 경제적 필요뿐 아니라 개인적 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해 근로 기간을 연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동연구원의 2023년 ‘중‧장년층 일자리와 삶의 질 연구’ 보고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장년층의 80%가 일과 개인 생활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유연한 근무시간이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60% 이상의 응답자가 자원봉사나 사회적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향을 나타냈다.
인생 2막을 여는 그레이 갭이어와 하비프러너
최근 ‘그레이 갭이어Gray Gap Year’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위의 조사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그레이 갭이어는 전통적으로 젊은이들이 학업과 경력 사이에 갭이어를 가지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그 대상이 중년층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여행, 학습, 자원봉사, 창의적 활동 등을 통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남은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회사를 떠난 후 그레이 갭이어를 가진 대표적 인물이다.

2008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게이츠는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을 통해 자선 활동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목표와 방향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선 활동과 재단 운영 외에도 독서를 통해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다양한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비프러너Hobby-Preneur’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하비프러너는 취미와 기업가를 결합한 개념으로, 자신의 취미를 사업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비프러너 현상은 특히 중‧장년층에서 많이 나타나며, 일의 의미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취미나 열정을 통해 가치와 보람을 느끼며, 이를 사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한다. 하비프러너들은 일과 취미의 경계를 허물며, 일 자체가 곧 삶의 즐거움이자 개인적 성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업무 시간을 따로 나누지 않고도 개인적 만족감과 성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기에 그 자체로 워라블인 것이다.

취미로 시작한 요리와 홈 데커레이션을 통해 거대한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마샤 스튜어트는 대표적인 하비프러너로 꼽힌다. 그녀는 모델과 증권 중개인으로 일했지만, 취미로 시작한 요리와 집 안 꾸미기에서 큰 영감을 받아 이를 사업화하기로 결심하고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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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하비프러너로 꼽히는 마샤 스튜어트. 요리와 집 안 꾸미기라는 취미에서 영감을 얻은 그녀의 사업은 요리책, 잡지,
TV 프로그램, 그리고 홈 데커레이션 제품 라인으로 확장되었다. 마샤 스튜어트가 1990년에 첫 발행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샤 스튜어트 리빙>
인스타그램 공동 창립자로 유명한 케빈 시스트롬Kevin Systrom의 창업 아이디어 역시 사진 촬영에 대한 깊은 취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 열정을 바탕으로 사진 공유 애플리케이션인 인스타그램을 개발했다.

이미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위의 사례들은 보여준다. 일상의 순간이 일과 연결되고, 그것이 곧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대, 일과 삶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내 삶의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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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글. 임병권(명지전문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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