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달라진 점을 수입·시간·자리·사람 4가지로 나누어 알아본다.
먼저 수입이 없어졌다. 퇴직 2년 후 퇴직금이 바닥을 쳤다고 유튜브·신문·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더니 “아니 대기업 임원, 상무보로 일했는데 퇴직금이 2년 만에 없다는 말이 이해가 안 돼요. 엄살 부리는 거 아닌가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퇴직금을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얼마의 퇴직금을 받았다. 하지만 재직 시에 받은 ‘우리사주’ 미납금을 갚아야 했다. 거기다 남편이 일했던 큰 회사가 공중분해되었다. 우리사주로 꼬박꼬박 넣었던 돈이 다 날아갔다. 퇴직금이 그대로 있거나 불어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예상치 않은 뭉텅이 지출이 생길 수도 있다.
퇴직금은 부부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가족의 미래가 걸려있다. 퇴직 당시, 아들 2명이 대학생이었다. 큰아들은 스페인에 교환학생 1년을 다녀왔다. 둘째는 일본에서 목수가 되겠다고 목조건축을 공부하러 갔다. 아들의 해외 학비와 부부 생활비로 쓰고 나니 퇴직금이 없어졌다. 다행히 아들 둘이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아버지 퇴직은 자녀를 빨리 독립시키는 계기가 되며, 아버지의 퇴직금은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된다.
퇴직금이 마른 후 매달 현금 흐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게 가장 큰 현실이다. 다달이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집을 팔아야 한다. 남들은 “집을 팔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하지만 집은 마지막 배수진이다. 인생 2막에 베이스캠프인 집은 어디든 있어야 하지 않은가.
두 번째, 퇴직 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살펴보자. 사실 퇴직 전에는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중에는 부서 회식이다, 거래처 접대다 해서 일주일에 3~4번 늦게 귀가했다. 주말에는 접대골프로 집에 없었다. 그런데 퇴직 후 24시간 함께 있으니 불편하고 어색했다. 퇴직 후 3개월 정도는 아내가 정성을 다해 아침·점심·저녁을 차릴 수 있다. 거기까지다.
아내가 변한다. 3개월 차려준 밥상을 기준으로 “내가 30년을 벌었는데 밥을 안 차려주나?” 말하면 부부싸움이 된다. 어떤 부부는 남편 퇴직 후 의논을 해서 ‘삼시세끼’를 어떻게 할지 정했다고 한다. 아침은 남편이 빵과 커피, 과일로 차린다.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는다. 저녁은 아내가 된장찌개, 나물이 있는 한식 밥상을 차린다. 각자 한 끼씩 분담하면 집안에 평화가 온다.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퇴직 부부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퇴직금이 마른 후 매달 현금 흐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게 은퇴 부부가 함께 헤쳐나가야 할 가장 큰 현실이다.
세 번째는 자리다. 자리는 다르게 말하면 위치다. 퇴직 전은 가장 연봉이 많은 시기로 직위가 높았을 것이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때 해발 8,000m 정상 부근의 하산 지점에서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퇴직 전 내가 받았던 높은 연봉이나 직위는 생각하지 않아야 내리막 경사로에서 넘어지지 않고 내려갈 수 있다. 퇴직 후의 자리와 위치는 내가 정한다. 아무도 만들어주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남편은 택배 분류를 시작한 해에 원광디지털대 동양학과에 입학해 4년간 국가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마포구 공덕동의 50+캠퍼스에서 오전에 사주명리, 주역,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오후에 땀 흘리는 노동을 했다. 아마 택배 일만 했으면 ‘나는 왜 여기에 있지?’라는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대신 공부와 일을 병행해 지행합일(知行合一)하는 일상을 꾸려서 극복할 수 있었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뿌듯함이 생겼다.
퇴직 후 본인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스스로가 의미 부여를 해야 한다. 이때 옆에서 자리와 의미를 만들어 주는 의례가 중요하다. 남편이 공덕동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 ‘공덕선생’이란 호를 내가 지어주었다. 공덕(功德)을 쌓아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미래지향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나 역시 무료강의를 시작해 강사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책을 써서 작가가 되었다. 남편 퇴직 후 6개월마다 새로 명함을 만들었다. 이제 1인기업 ‘OK지식나눔연구소’ 대표다. ‘지식농부’라는 브랜드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특허청에 상표출원을 했다. 이처럼 퇴직 후는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가는 시기다. 그 길은 결코 꽃길이 아니다. 울퉁불퉁한 길이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위험과 기회가 있어 긴장되고 떨리는 길이다.
네 번째는 사람이다. 퇴직 후 자연스레 인간관계가 정리된다. 회사를 중심으로 했던 모임은 거의 끊어진다. 이제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친구나 잘 아는 사람이 취업을 도와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동창들 모임은 별 의미가 없다. 아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가까울 뿐 새로운 일자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퇴직 전 나의 직함이나 직업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 편견 없이 일자리를 소개해줄 수 있다. 공부나 취미, 취업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면 기회가 생긴다. 기회를 만들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1만 원의 행복’이 유행했는데 요즘은 밥값이 올라 ‘2만 원의 행복’으로 수정해야겠다. 2만 원 내고 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과 밥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정보를 교환한다.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레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다. 자연스레 다른 사람을 돕고 모임에 기여할 때 다시 만나자고 하고 일자리도 소개해 준다. 사귀는 사람은 동년배도 좋고 아래, 위로 10년 차이 나는 사람들은 소통을 잘하면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 좋다.
2020년 코로나19가 시작되자 나는 줌(Zoom)으로 공부를 시작해 30대 1인기업 대표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젊은 사람들의 빠른 실행력을 따라갈순 없었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배워 온라인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챗GPT를 비롯해 구글의 협업 도구 사용을 익히는 등 디지털 역량을 높이고 있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젊은 사람과 만나면 액티브해진다. 그들이 잘 사용하는 디지털을 배우면 시니어들에게 일할 기회가 온다. 블로그·유튜브·인스타·페이스북에 하는 온라인 홍보를 배워 수입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의 일로 돈을 받는 사람은 프로라 할 수 있지만, 한번 프로라고 영원한 프로는 아니다. 다음에도 나를 선택할 수 있게 정성을 들여야 한다.
퇴직 후 50년을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다. 어떤 일도 그냥 되는 일은 없다. 부부가 힘을 합쳐 수입이 나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생 후반전에 3가지 기술을 갖출 필요가 있다.
퇴직 후 50년을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다.
어떤 일도 그냥 되는 일은 없다.
부부가 힘을 합쳐 수입이 나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