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는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 바람을 타고 온 향기가 코끝에 스치는 순간, 그 향기를 맡았던 시간과 공간으로 우리를 단숨에 데려간다. 햇살에 잘 마른 빨래들이 빨랫줄에 가득하던 어린 시절 집 앞마당이거나 학창 시절 뛰놀던 교실 한가운데일 수도 있다. 후각을 통해 추억은 쉬이 소환되고, 그 추억과 기억 덕분에 삶은 오늘도 한층 더 달콤해진다.
후각은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즉각적 반응을 끌어낸다.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교의 베티나 파우제Bettina Pause 생물심리학 교수는
“시각, 후각과 달리 인간은 체내 화학적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바꿀 수 없다”며 “그것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라고 언급했다.
이는 뇌파 실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실험에 따르면 청각과 시각은 뇌에 정보를 저장하는 시간이 단 6초밖에 되지 않지만, 후각은 최소 5배가 넘는 시간 동안 뇌에 정보를 저장한다.
또 인간은 자면서도 냄새를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깊이 잠든 사람의 코 밑에 장미꽃을 갖다 대면 표정이 바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형사가 사건을 수사할 때 논리적 추리에 앞서 어떤 낌새를 느끼면 “냄새를 맡았다”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후각은 늘 간발의 차로 다른 감각보다 앞서는데, 우리가 후각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혹적이라도 보고 듣고 만지는 행위를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냄새는 우리 코를 그저 통과해버린다.
1 베티나 파우제 교수는 저서 <냄새의 심리학>에서 오감 중 후각은 숨길 수 없는,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를 준다고 분석했다.
2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는 후각의 본능적 특징을 예술적 상상으로 극대화해 사람을 매혹시키는 향수가 등장한다. ©(주)누리픽처스
후각의 주요 기능인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냄새를 잘 맡고 이에 따르는 삶은 진실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냄새를 풍기고 타인의 냄새를 통해 지각과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다.
후각이 발달한 사람들의 뇌는 감정의 중추인 편도체와 사회적 뇌인 중간 전두엽 간 연결이 뛰어났다.
<냄새의 심리학> 저자 베티나 파우제 교수는 후각이 사회성과 연관성이 깊다고 강조한다. 사회적 관계망이 넓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냄새를 더 잘 맡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화학적 의사소통이 중요할 수밖에 없으므로 냄새를 잘 감지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관계에서 유리하다.
인간도 다른 포유류에 비해선 후각이 퇴화했다지만 시각이나 촉각보다 후각으로 가려낼 수 있는 것이 많다. 시각이나 촉각으로 가려낼 수 없는 이물질도 옷에 묻었는지 여부를 후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대표적이다. 기능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인간은 최소 4,000여 가지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후각의 강렬한 인상은 인간 뇌 구조의 특성 때문에 사람의 기억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짜릿한 사건의 기억은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4,000여 가지 냄새라는 정서와 함께 뇌리에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억은 냄새와 얽히면서 강한 증폭작용을 한다.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일을 전하는 기준으로 냄새가 거론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삼국사기>에 냄새, 즉 ‘향기’가 언급된 기록은 총 16건에 달한다. “왕이 태어난 날 저녁에 신비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라는 표현처럼
왕의 탄생이나 즉위, 불교의 도입과 연결되거나 귀족 가옥에서 의 침향 허용 여부에 거론되는 식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를 맡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찬란
기억과 후각의 작용은 소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라는 말이 있듯이 후각의 자극을 통해 과거 기억을
재생해낼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뛰어난 지성과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 ‘나’는 이렇게 읊조린다. “늙은 요리사가 가져다준 토스트 한 조각을 차에 적셨을 때, 나는 제라늄과 오렌지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이 주는 아주 특별한 빛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 여름을 기억할수 있었다. 내가 차에 적신 비스코티를 맛보는 순간, 내 앞에는 무채색의 정원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일상의 기억도 향기라 할 법한 좋은 냄새와 함께 할 때 뚜렷하게 떠오른다. 거리를 지나다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빵 가게의 달콤한 향기,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저녁밥 냄새, 첫사랑에게서 느껴지던 아련한 샴푸 향까지 후각과 연관된 기억이 감정적으로 증폭돼 다가온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강신재 작가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이다. 열여덟 살의 여고생 주인공은 어머니의 재혼으로 가족이 되어버린 대학생 오빠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저 글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듯 이복오빠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후각을 자신의 마음 혹은 작품 속 등장인물의 마음을 드러내는 요소로 자주 사용한다. 전혜린 작가의 일기장에 쓰인
“어두운 밤, 자욱한 안개, 별들의 냄새”라는 표현에서는 외로움의 정서가 느껴진다.
역사 속에서 좋은 냄새는 자존심과 직결된다는 사례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상류층 여성들은 거리의 먼지와 오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하이힐을 신고, 향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정러시아의 예카테리나Ekaterina 여제는 향수를 푼 물에 발을 담근 뒤 공작 깃털 부채로 말리는 것을 좋아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는 치아가 모두 망가져 구취가 발생하자 향수를 뿌린 손수건으로 감췄다는 일화도 있다.
1 후각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한 영화 <기생충> ©CJ ENM
2 향수를 푼 물에 발을 씻은 뒤 공작 깃털 부채로 말리는 것을 즐겼던 예카테리나 여제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후각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왼쪽 뇌를 억제하면서 창조적인 오른쪽 뇌를 자극한다. 이 때문에 후각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감정 농도는 다른 감각에 비해 훨씬 높다. 헬렌 켈러는 “냄새야말로 나를 수천 마일 떨어진 먼 곳으로 데려다주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세월을 뛰어넘어 시간 여행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마법사”라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는 유일한 감각인 후각은 삶을 보다 향기롭게 만드는 요소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