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흐르는 시간을 뒤로 가게 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픽션’이 중요하다.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 속 인물이 해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희열과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과거로 회귀하거나, 누군가의 몸에 빙의하거나, 환생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명 ‘회·빙·환’의 인기는 아직도 뜨겁다.
현실 세계보다 판타지로 가득한 이야기의 인기가 뜨겁다. 이야기 전개상 주인공이 어떤 시점에서 정체가 탄로나거나 바뀌는 일은 오래전부터 픽션의 주요 장치였다. 요즘은 회귀와 빙의, 환생이라는 형태로 주인공이 아예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는 전개가 대세를 이룬다.
회귀의 의미는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과 지식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인공이 어떤 힘에 의해 우연히 과거의 어느 시간 속으로 ‘타임 슬립’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시간으로 빠지게 된 이유가 중요하다. 회귀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이 후회하는 상황이다. 즉 암담한 현실에 심하게 좌절하거나 죽음 직전 또는 죽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얼마 전 역대급 ‘선재’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주인공은 자신의 ‘최애’가 처한 상황에서 좌절을 겪다가 우연히 과거로 회귀해 미래를 바꾸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는 회귀하는 이야기로 역대급 화제성을 낳았다.
빙의는 타인의 몸속, 정확히 말하면 정신으로 들어가는 경우로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로 빙의할 수도 있고, 차원이 다른 세계나 창작물속 인물에 빙의하기도 한다.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이 수행원으로 모시던
재벌 진씨 일가의 막내 손자로 빙의한 것이 그 예다. 최근엔 동명의 웹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가 빙의 소재로 주목을 받았다. 주인공인 조폭 ‘김득팔’이 열아홉 왕따 고등학생의 몸에 빙의해 학폭 문제를 해결한다는 스토리다.
열두 번 환생하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는 티빙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환생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경우다. 환생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새로 태어났기에 성장과 시련, 단련과 완성의 과정을 거친다. 다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살아가기 때문에 기존 인물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되지만, 주인공이 이전 생의 기억과 능력을 지닌 채 환생하므로 환생 전보다 이후의 이야기에 집중된다. 최근 글로벌 역주행으로 인기몰이 중인 OTT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주인공 ‘이재’는 환생을 통해 열두 번의 죽음과 삶을 경험하게 된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현재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로서 더 나은 결말을 쟁취한다는 것이다. 뻔한 결말이 아닌 다른 결말에 대한 호기심과 반전에 대한 기대감이 우리를 ‘회·빙·환’에 열광토록 한다.
‘회·빙·환’의 세계관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거슬러 올라가보자. 1985년 개봉한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불운한 인생을 역전시키고자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그린 회귀물의 원조 격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잘못된 점을 바꾼 주인공이 보다 나은 현재를 살게 되었다는 설정은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이야기는 ‘다중 우주론’의 등장으로 새롭게 진화했다. 또 다른 지구, 또 다른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 이론은 과거를 바꾸어도 현재의 나는 바뀌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웜홀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행동을 바꾼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다시 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다중 우주 세계관이 펼쳐졌다. 주인공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대사는 회·빙·환 전개 방식을 비튼 것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주인공은 다중 우주에서 만난 다양한 버전의 자신에게서 현실을 구할 능력을 전수받는다. ©워터홀컴퍼니
다중 우주 세계관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두드러진다. 위험에 처한 가족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다중 우주에서 만난 자신으로부터 다양한 능력을 부여받는다는 전개로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현실에서 시간은 유일하고, 독립적이며,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흘러가는 시간은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이다. 하지만 판타지 세상에서는 다르다. 회·빙·환 세계관에서만큼은 시간을 유연하게 통제하고, 경계 없이 넘나들며 리드할 수 있다.
한편으론 씁쓸할 수 있다. 결국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우리를 판타지에 열광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회·빙·환 세계관이 주목받는 배경은 좀 더 디테일하다. 여기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타인에게 뒤처진 현재 상황을 ‘리셋’하고 싶은 열망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다시 시도하거나 지금과는 다른 환경에 놓였을 때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부정이나 절망이 아니라 기대와 희망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부여된다. 공평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건의 변주는 시간을 느리게 혹은 빠르게 흐르게 한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대사처럼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어렵고,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2배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서 ‘리셋’이라는 장치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또 미래에서 온 주인공은 바꾸고 싶었던 과거를 직접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고, 과거의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어 고난과 실패를 겪지 않는다.
현실에서 시간은 유일하고, 독립적이며,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흘러가는 시간은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이다.
하지만 판타지 세상에서는 다르다. 회·빙·환 세계관에서만큼은
시간을 유연하게 통제하고, 경계 없이 넘나들며 리드할 수 있다.
주인공이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느낀다. 이뤄지지 못한 일들로 가득한 현실이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맞이하는 일명 ‘사이다’ 전개는 희열을 안겨준다.
회귀의 경우 최근 레트로 인기에 부합하는 과거의 문화적 요소가 다양하게 등장하면서 보는 재미를 더한다.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에 등장한 워크맨이나 <선재업고 튀어>에서의 싸이월드와 빙수 카페 ‘캔모아’ 등은 시청자의 트로 감성을 자극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회·빙·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슈퍼맨 같은 초월자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의 일반 대중처럼 평범하게 그려진다는 점은 인기를 더하는 요소다.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한 사람들은 주인공의 고난과 모험 그리고 성취에 희로애락을 느끼며 점점 빠져든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회·빙·환 세계관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젊은 세대가 현실에서 직면한 좌절감을 도피하기 위한 문화라는 비판적 시선도 있지만, 단순히 과거를 바꿔 미래를 업그레이드한다는 공식에서 벗어나 과거를 바꿔도 미래를 바꾸지 못하거나 스릴감 넘치는 요소를 가미해 주인공의 고난이 심화되는 등 이야기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어 당분간 높은 인기는 계속될 것이다. 디지털 사회라는 현재와 아날로그로 가득한 과거가 융합하는 새로운 장르라는 점만으로도 꽤나 매력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