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마지막 금요일 퇴근길, 그들은 살롱에 간다. 살롱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모이게 하는 힘이 있다. 무엇이 이들을
행복하게 할까? 살롱 문화에는 여가 시간의 공유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생각을 교류하는 전통이 녹아 있다. 살롱 문화의 역사와 지금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 살롱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하루의 삶 속에서 속박과 답답함을 느낄 때, 뭔가 갈망하고 갈증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자유정신이 살아 숨 쉬는 살롱에서 더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자유정신 속에는 파괴성과 창조성이 공존한다. 파괴성이란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불행에 대한 인식이며, 창조성이란 이제껏 자신이 해온 역할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더 높이는 것이다. 살롱에서는 자유정신에 대한 깊은 영혼의 소리를 통해 성공에 대한 열망과 그것으로부터 매몰되지 않는 자신을 분리해내는 능력을 배운다. 깊어가는 살롱의 밤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꽃핀다.
직장도 가정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제3의 공간이며,
지나친 욕망으로부터 자제와 절제를 시켜주는 물뿌리개와 같다.
살롱에는 모든 인생이 다 녹아 있다. 서로를 환대하며 서로의 느낌을 편안히 나누는 곳, 살롱은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면서 그 자체가 따듯한 매개체인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이름난 조프랭 부인의 살롱. 조프랭 부인의 살롱은 예술가와 계몽사상가 등이 의견을 교류한 ‘담론의 장’이었다.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 ‘1755년 마담 조프랭의 살롱’, 1812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살롱 공간 모습. 살롱은 귀족들이 문인, 예술가를 초청해 토론을 하거나 음악을 듣는 공간이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성이나 저택에서 가장 공들여서 꾸미는 공간 중 하나였다.
프랑스어 살롱Salon은 매우 매혹적인 단어다. 그 말 속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마담과 당대의 진지한 지성인들,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은 물론이고 과학까지 포괄하는 그 시대의 모든 지식과 문화가 녹아 있다. 살롱 문화는 유럽 17~18세기 유럽 귀부인의 테라스에서 시작되었다. 귀족 출신 여성들이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단하게 차를 마시면서 시작한 살롱은 주인 마담들의 고상한 취향과 지식에 대한 열정으로 그림과 음악, 시와 문학 그리고 토론이 함께하는 학습과 사교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로코코 시대의 유럽 문화가 화려하게 꽃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살롱에서의 예술과 문화적 담론 덕분이다. 지성인들의 담론은 시대의 흐름을 꿰뚫고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여성과 평범한 시민들도 역사와 시대정신에 눈뜨게 하는 학습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살롱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4~5세기 그리스 아테네의 젊은 귀족들은 스포츠를 통해 몸과 마음과 정신력을 일깨우는 동시에 지적인 문화 모임도 가졌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향연>을 보면 지식인들은 당시 화제가 되던 정치, 문화, 철학의 주제에 대해 와인을 즐기며 담론과 토론을 나누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러한 문화는 로마 시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대화의 장이던 플라자Plaza와 포럼Forum으로 이어졌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교인과 지식인이 예술가들과 함께 아름다운 산문과 시, 음악을 향유하던 무젠호프Musenhof를 거쳐 프랑스의 살롱Salon이 생겨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아테네의 젊은 귀족들이 정치, 문화, 철학에 대해 담론과 토론을 나누는 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그리스의 이러한 문화는 이후 플라자와 포럼, 살롱으로 이어진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1년.
프랑스에서는 마담이, 이탈리아에서는 살로니에르Salonnie`re가 살롱의 편안한 토론 분위기를 만들며 모임을 진행했다. 최초의 살롱 마담은 1608년 랑부예 부인이다. 랑부예는 값비싼 조명과 화려한 장식품으로 꾸민 멋진 저택에서 소수의 귀족, 작가, 법관, 철학자, 성직자들과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만남은 곧 우아하고 세련된 화법으로 담소를 나누거나 문학작품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살롱 문화>의 저자 서정복 교수는 “살롱은 사교의 장場인 동시에 지성인들의 사상 교류의 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당시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살롱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살롱의 수가 800개가 넘을 정도였다.
랑부예 부인 이후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많은 ‘스타 마담’이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여성해방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마담 랑베르, 정계 진출의 야망을 가졌던 마담 탕생, 순박하고 겸허하며 예술적이었던 마담 조프랭, 재치와 지성으로 충만했던 마담 데팡 등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을 운영했던 조프랭 부인Mme. de Geofrin은 자신의 살롱에 철학자와 문학가, 예술가 등을 요일별로 초대했다. 고정적으로 운영되며 전 유럽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그녀의 살롱은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 1)의 사상적 실험실이자 몽테스키외ㆍ볼테르 등 계몽사상가들이 지성을 교류하는 장이 되었다. 또 조각가 부샤르동, 화가 반 루와 부셰 등이 모여 예술적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
최초의 살롱 마담 랑부예 부인이 모임을 주최했던 랑부예 저택의 모습.
살롱에서 벌어진 철학과 문학, 정치학 토론은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 앙드레 몽시오, ‘니농 드 랑클로의 집에서 타르튀프를 읽는 몰리에르’, 18세기.
음악가들도 살롱에서 후원자를 찾거나 귀족 계층,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피아니스트 쇼팽의 일화가 유명하다. 쇼팽은 녹턴 등 살롱에 적합한 실내악곡을 여럿 작곡했는데, 몇몇 녹턴 곡은 살롱의 주최자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쇼팽의 곡 선물을 받은 이는 19세기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살롱을 운영한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 아포니Apponyi다. 쇼팽이 운명의 연인이자 여섯 살 연상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난 것도 살롱에서였다.
무관의 여왕,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퐁파두르 부인은 많은 예술가를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몽테스키외 등 가난한 사상가들을 지원해 백과사전을 집필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일반 서민과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결정적 역할을 한 시대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나중에 점차 정치색이 짙어지는 모임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살롱의 정체성은 누가 뭐라 해도 문화 지향적인 사람들이 모여 순수하고 즐겁게 교류했다는 점이다.
미래에셋대우는 2012년부터 최상위 VIP인 오블리제 클럽 고객을 대상으로 프라이빗 문화ㆍ예술 클래스 ‘살롱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다. 오페라, 고전古典, 예술, 미술 시장 트렌드 등 다양한 인문학적인 주제를 고객의 품격에 맞게 구성해 진행하고 있으며 매년 참석하는 고객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현대의 성인에게는 공부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평생 학습의 시대, 성인 학습은 상호 학습이다. 또한 성인 학습은 고품격 놀이다. 각자가 경험하고 가진 지식과 노하우를 서로 나누며 공유하는 것이다. 일생을 통해 평생 학습하는 자세로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면 변화무쌍한 질곡의 세상을 좀 더 인문학적으로 살지 않을까.
인문학 살롱에서는 음악, 시, 미술, 문학, 철학, 금융, 와인 등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가 오간다.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지적 경쟁력의 시대에 소중한 만남과 유익한 정보 그리고 학습이 함께 어우러지는 즐겁고 재미있는 학습의 장이다. SNS와 피상적 인간관계에 지친 이들을 위한 감성적 대화 문화의 산실, 성인 학습의 품격 있는 공간으로 기능할 새로운 한국적 살롱 문화의 부활을 꿈꾸어본다.
파리의 음악 살롱은 새로운 실내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였다. 어린 모차르트가 파리에 방문했을 때 데뷔 무대도 콩티 공작의 살롱이었다.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 ‘1764년 템플성, 카트르 글라스의 살롱에서 영국식 티타임’, 18세기.
유혜선 G-SM(Global-Service Marketing)
컨설팅 대표로 10년째 문화계 명사들의 강연 등과 함께하는 와인 인문학 살롱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당당한 서비스>, <블루스타킹: 잠자는 카리스마에 키스하라>, <그녀의 명품 스피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