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MENT / 투자상품 및 자산배분전략
2021. 07. 14
백만장자 세 명문가의 기부,
인류 문명을 꽃피우다
기록 문명의 위대한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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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역사, 인류의 문명. 인간에게는 기록에 대한 욕망이 내재하고 있다.
문명의 발전은 의식주가 해결되었을 때 이루어지고, 그 성취를 기록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치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마디마디에는 당시에 큰 힘을 불어넣은 명문가가 있다.
막대한 부를 이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류 문명의 큰 등대가 된 세 명문가의 기부 역사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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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록펠러가,
다인종·다문화 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자선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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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에서 기부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이러한 미국 부자들의 기부 문화 역사의 시초가 된 것은 ‘석유왕’ 존 록펠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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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명물로 손꼽히는 록펠러센터 앞의 연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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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D. 록펠러는 자선사업가로 변신하기
전에는 악덕기업가로 악명이 높았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못 하고 일찍부터 사업가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1863년 석유산업에 뛰어들었다.
1870년에는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설립해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독점하는 미국 최대 정유 회사로 키웠다.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그는 악덕기업가로 악명이 높았다. 그를 바꾼 건 독점 체제에 대한 법원의 위법 판결이었다. 이때 재계에서 은퇴한 후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거금을 투자해 시카고 대학교를 세웠으며, 록펠러 의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많은 돈을 기부했다. 1913년 5000만 달러를 투자해 설립한 록펠러 재단이 전개한 병원, 교회, 학교 등의 자선사업이 현재까지 미국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출신 지역, 인종과 언어가 다른 미국 국민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게 만드는 원동력에는 바로 최고의 갑부가 실천한 베풂과 나눔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록펠러가가 사회에 환원한 막대한 부는 미국 사회 전반에 기부 문화가 뿌리내리는 자양분이 되었고, 현재는 워런 버핏이 록펠러가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 워런 버핏과 빌게이츠는 미국의 억만장자들에게 최소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권하는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모임을 시작했는데, 워런 버핏은 올 7월에도 기부를 실천해 현재 총 기부액이 약 40조원에 이른다. 우리가 미국을 위대한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록펠러가가 뿌리내린 위대한 봉사 정신이 나라를 튼튼히 받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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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메디치가,
이들이 없었다면 인류에게 르네상스 문명은 없었다
유럽은 부富 자체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후원하는가가 명문가의 잣대가 되어왔다. 중세와 근세 유럽의 명문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좋은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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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가 없었다면 인류에게 르네상스 문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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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을 진리로 여기는 중세 카톨릭 사회에 반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과학으로 맞선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피에타’ 등의 걸작을 남긴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들이 사회적 억압과 가난한 생계로 고통받을 때 뒤를 묵묵히 받쳐주며 재능을 펼치게 한 것은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가의 기부는 여러 대에 걸쳐 축적된 아름다운 가풍이었다. 평상시에도 검소했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은행업으로 번 돈을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 북문의 ‘그리스도전’을 조각하는 21년, 동쪽의 청동문 ‘천국의 문’을 제작하는 27년, 총 48년 동안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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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로렌초’로 불리는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예술가를 직접 후원하는 문화를 뿌리내려 르네상스 문화의 만개를 도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는 플라톤 철학에 감명받아 고대 문서를 사들이고 산마르코 수도원에 도서관을 세웠다. 이것이 이탈리아 최초이자 유럽 최초의 공공도서관이었다. 또한 그가 세운 플라톤 아카데미는 최고의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는 지식의 광장이 되었다. 그 뒤 ‘위대한 로렌초’라고 칭송받은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드디어 피렌체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부흥운동인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피렌체와 메디치가의 번영 또한 정점에 올랐다. 이를 견제한 나폴리 국왕과 직접 담판을 지어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오는 한편, 피렌체의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했다.

당시 활발한 무역으로 부를 쌓은 부자들이 예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나 돈을 버는 것은 중개상이었고, 정작 예술가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이때 로렌초가 처음으로 예술가에게 직접 작품을 주문하고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를 직접 후원하는 문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메디치 가문인 것이다.

1737년 메디치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인 궁전·미술관·도서관·은행·교회·수도원 등 건축물들은 르네상스 부흥의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문화유산으로 숨 쉬고 있다. 또한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을 존중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로 전 인류의 정신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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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발렌베리가,
드러내지 않는 거인의 사회환원
발렌베리가는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스웨덴 기업집단을 경영하는 대표적인 기업경영 가문이다. 스웨덴 2위 은행인 SEB, 일렉트로룩스, 에릭슨, 사브 등 100여 개 계열사를 보유하며 340조원 가치의 회사를 경영하는 발렌베리가. 1856년 창업한 이후 160여 년간 5세대에 걸쳐 가족 승계를 하고 있음에도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가족경영 기업의 모범이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발렌베리가의 아들들은 무조건 스웨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창업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스웨덴의 미래를 개척하려면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고, 거친 바다 생활이 강인한 정신력과 넓은 시야를 길러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녀를 매우 검소하고 엄격하게 길렀기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 유학을 가는 것 또한 당연한 가풍이었다. 이렇게 길러진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후계자도 항상 두 명의 리더 자리에 놓여 경영 능력을 견제받고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발렌베리가는 대중매체의 조명을 받는 것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언제나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 참여했다. 미터법 도입과 여성해방에 이르기까지 스웨덴의 근대 개혁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전쟁 중에는 외무 장관을 맡아 심각한 무역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1917년 이래로 발렌베리 재단은 여러 기부 활동을 이어왔으며, 특히 과학 분야에 매년 3억 달러를 집중적으로 지원해 기초과학 분야의 스웨덴 노벨상 수상자 중 발렌베리 재단의 도움을 받지 않은 과학자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기업가 집안인 발렌베리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외교관을 지낸 라울 구스타프 발렌베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외교관 신분으로 있으면서 헝가리 유대인 수십만 명을 스웨덴으로 탈출시켜 ‘스웨덴의 쉰들러’로도 불렸으며, 전쟁이 끝나기 직전 러시아에서 실종된 전쟁 영웅이다. 지금도 진정한 인류애를 실천한 그를 스웨덴이 아닌 여러 나라에서 기억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거리와 공원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라울 발렌베리를 기리는 위원회가 창설되어 매년 10월 5일을 ‘라울 발렌베리의 날’로 정해 추모하고 있다. 나라와 국민, 나아가 정의를 위해 헌신하며 자유를 수호한 발렌베리가의 희생에 어쩌면 스웨덴은 물론 전 세계 인류가 빚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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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촬영한 발렌베리 일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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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발렌베리 가는 자본주의, 힘, 봉사를 상징하는 거인이다.
160년 동안 위세를 떨쳤음에도 그들은 앞에 나서거나 옳지 않은 방향으로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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