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밤,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말했다. “이제 우리한테 남은 봄은 50번밖에 없네.” 그 순간 나는 빠른 속도로 흙이 쏟아지는 모래시계가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가 살면서 맞이하는 봄은 아무리 많아야 100번이겠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손꼽을 추억 없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봄을 그린다.
영영 여름으로 넘어가지 않는 계절을 그림에 담아, 우리가 언제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도록. 코끝을 간질이는 더운 바람과 회색 도시를 알록달록 채우는 빛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어떤 시간은 항상 돌아오는데도 매번 설렌다.
1868년 봄, 프랑스에서 목화 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프레데릭 하트만Frederick Hartmann, 연도 미상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1875에게 ‘사계절’을 주제로 연작 그림을 주문한다. 사실 하트만은 이 작품을 프랑스의 풍경화가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에게 먼저 의뢰했지만, 루소가 1867년 사망하면서 밀레가 배턴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밀레에게 이 작업은 주문자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는데, 생전 루소와 둘도 없는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밀레가 생활고를 겪던 시절, 루소가 밀레의 그림을 익명으로 구매해 도움을 준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밀레에게 이 작업은 먼저 떠난 친구의 숙원 사업을 대신 마무리해주는 일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밀레는 장장 5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사계절의 첫 작품 ‘봄Le printemps’(1873)을 완성했다. 다소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 너머, 화면 왼쪽 상단부의 쌍무지개가 희망찬 빛을 몰고 오는 그림이었다.
“나는 봄의 소나기를 바라보고 있다. 이 순간, 내눈은 오직 봄비가 내리는 풍경을 위해 존재한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초록 잎과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풍경의 무지개를 느끼기 위해서다.” 밀레는 ‘여름Buckwheat Harvest, Summer’(1874)과 ‘가을Haystacks: Autumn’(1974)을 연이어 제작했지만, 결국 ‘겨울’은 끝내지 못한 채 삶을 뒤로하고 말았다. 미완성 유작이 된 밀레와 루소의 사계절은 열린 결말로 남아 둘의 우정에 더 심오한 의미를 더해준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밀레의 ‘봄’이 먼저 죽은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담아낸다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Country road in Provence by night’(1890)에는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관계가 드러난다. 1888년 동료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크게 싸우고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는 1889~1890년 프랑스 남부 생레미 정신병원에 머물면서 위안을 찾았다. 이 시기 그린그림에는 유독 사이프러스가 자주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밤하늘이 회오리치는 화풍은 고흐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당시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에는 별 하나가 보이는 사이프러스 그림을 그리고 있어. 초승달이 어두운 땅에서 솟아난 듯한 밤하늘, 군청색 하늘, 그 사이로 눈부시게 떠오른 별 하나. 분홍색과 초록색의 부드러운 반짝임이야.” 모두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고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진솔한 눈으로 바라보고 이를 화폭에 담으려 했다. 당시 그에게 밤하늘은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의 시커먼 구덩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별을 잉태하는 푸른생명의 바다였을지 모른다.
그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테오는 고흐의 암흑 같은 삶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샛별이었을 테다.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1년 전, 그토록 자주 그렸던 사이프러스는 남유럽에서 무덤가에 심는 나무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하얀 캔버스는 겨울철 설경을 닮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려 온 마을을 덮어버리는 웅장한 풍경. 그 위를 알록달록 물감으로 채우는 화가의 붓질은 삭막한 겨울이 지난 후 빈 가지에 활짝 피어나는 봄꽃 같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는 화창한 날씨에 소풍 나온 남녀를 그린 인물화로 유명하지만, 꽃 그리기를 좋아해 평생 많은 정물화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답게 현실의 대상을 시각적으로 똑같이 묘사하기보다 생동감 넘치는 붓 터치와 따뜻한 색감으로 꽃이 발산하는 분위기를 담으려 노력했는데, 이 특징은 ‘장미 Roses’(1890)에도 두드러진다. 촛불이 아련하게 흔들리는 듯한 꽃잎과 간결하게 처리된 배경, 달콤한 색채로 재현된 장미는 연약한 동시에 강렬하고, 불안하면서도 자유롭게 느껴진다.
특히 르누아르는 말년에 관절염을 앓아 고생했지만, 붓을 손가락에 잡아맨 상태로 그림을 그리면서 까지 뜨거운 열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일반적으로 미술사에서 ‘꽃 그림’은 한철의 아름다움과 삶의 무상함을 호소하지만, 르누아르의 ‘장미’는 그 투박한 터치가 그림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쉽게 지지 않는 힘을 상기시킨다.
현실을 뛰어넘는 이미지로 현실 이상의 풍경을 선사하는 또 다른 화가로는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를 빼놓을 수 없다. 마티스는 르누아르와 마찬가지로 사실적인 묘사를 버리고, 색의 마술같은 에너지를 이용해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형태를 철저하게 단순화하고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하는 화풍은 마티스의 가장 큰 특징. 그에게 그림이란 평면에 선과 색을 리드미컬하게 배치하는 즐거운 놀이로, 형상의 배치와 여백 공간, 비례 등 색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화면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다.
‘붉은 실내Red Interior/Still Life on a Blue Table’(1947)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테이블 뒤로 열린 문이다. 만약 다른 화가가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면 테이블을 확대해 오직 정물에 집중했겠지만, 마티스는 3차원 공간의 입체감을 가볍게 무시하고 마치 색종이를 오려 만든 콜라주처럼 현실을 재구성했다. 보색을 교묘하게 살린 색채의 순도를 높여 평면성과 장식적 구성, 화면의 조화를 실험해 이후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봄날의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더기 진 꽃의 화사한 색채 때문이듯, 르누아르와 마티스의 그림에서도 회화의 색이 주는 효과를 새삼 음미해볼 수 있다.
인상파 화가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그는 활동 초기에 ‘풀밭 위의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1863)와 ‘올랭피아Olympia’(1863) 등 화단의 금기를 깨는 그림을 발표해 혹평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그림은 외부 세계보다 오직 캔버스에 충실해 어떤 요소도 자유롭게 그릴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지켜나갔고, 그가 주장한 ‘화가의 특권’은 후배 세대에게 드넓은 길을 열어줬다. 파격적인 행보로 논란을 일으켰던 젊은 시절을 지나, 말년에 그린 ‘봄Spring’(1881)은 파리 여인을 상징한 작품으로 마네의 예술 활동을 통틀어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관능미와 우아함을 극적으로 끌어올린 묘사와 시원한 구도는 그야말로 봄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얻었다. 그런데 인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봄의 기운이 마냥 충만하다고 해석하기엔 그 표정이 다소 찜찜하다. 조금은 쓸쓸하고 덧없어 보이는 비애에 찬 얼굴… 혹시 20년간 살롱에서 거부당하고 논란에 부딪힌 마네가 말년에 느낀 허무한 심정을 투영한 게 아닐까? 봄이란 마네 ‘봄’의 여인처럼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설렘과 지나간 세월에 대한 공허함이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계절이다.
한편,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는 식물을 재치 있게 배치해 인간 얼굴을 형상화한 기법으로 특유의 화풍을 개척했다. ‘사계절’ 연작 중 ‘봄Le Printemps’(1573)은 봄에 피는 꽃과 채소를 유사한 색채끼리 분류해 잔잔한 미소를 띤 소년을 그렸다. 세부요소를 하나하나 관찰하면 한 송이의 꽃과 나뭇잎일뿐이지만, 멀리서 볼 땐 착시를 일으켜 완전한 사람의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르침볼도는 본래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 화공으로 일하다가 궁정화가가 되어 이같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작은 색유리 조각을 퍼즐처럼 맞춰 아름다운 이미지를 조합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훗날 그의 회화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언뜻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오랜 세월 저속한 것으로 취급해 무시했지만, 초현실주의가 융성하면서 재평가됐다. 마네와 아르침볼도의 그림처럼 오늘날 우리가 명화라고 받아들이는 작품도 화가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순간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건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봄 그 이상의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