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은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다.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고, 맛깔스러운 음식을 요리하게 해주는 ‘불’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힘, 전투, 피, 사랑, 정열, 욕망 등 빨강에는 수많은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붉은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가을에는 마음이 괜히 간질간질해서 외로움도 곧잘 타곤 한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도 낙엽수로 가득한 센강의 풍경을 기록했다. 특히 그가 애정을 가진 장소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르장퇴유인데, 센강을 길게 끼고 있어 한적한 분위기를 즐기기 좋은 마을이다. 모네는 화구를 들고 강가로 나와 시간마다, 계절마다 변하는 센강의 모습을 담았다. 그중 가을을 주제로 그린 ‘아르장퇴유의 가을Autumn on the Seine, Argenteuil’은 낙엽이 만발한 풍경이 인상적인 명화다. 수평으로 나뉜 화면에서 하늘과 강은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모네는 물가에 비친 나무를 과감하게 묘사하면서 그 경계를 무너트렸다.
조용한 하늘과 강이 중심이 되어 자칫 지루할 뻔한 구도에 화염 같은 가을 나무가 캔버스를 집어삼킬 듯 나타나 눈을 사로잡는다. 빨강이 부린 묘술에 하얀 구름은 모락모락 물들고, 붉은 물방울은 바다까지 흘러 내려간다.
가을은 소리까지 즐겁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리를 산책하면 선선한 바람, 청량한 공기, 알록달록한 볼거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오감을 자극한다. 폴고갱Paul Gauguin의 ‘아를의 알샹 레인Lane at Alchamps, Arles’은 절정에 이른 만추를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가장 먼저 화면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사선의 거리와 가운데 자리를 탄탄히 잡은 나무에 관심이 쏠리고, 그 뒤로 납작하게 표현한 집과 바위가 뒤따라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가을 냄새가 솔솔 풍기는 인상과 다르게 이 그림은 하나씩 살펴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단순하게 처리한 건물, 밋밋한 하늘, 볼륨 없는 나무 둥치, 뭉개진 붓처리까지, 고갱은 의도적으로 세필 묘사를 비껴가면서 가을의 멋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되살렸다. 가지 끝에 매달린 처연한 빨강, 지상으로 떨어지는 유한한 빨강, 바람에 휩쓸려가는 풍류의 빨강, 선명하고 흐리고 매섭고 부드러운 빨강의 스펙트럼….
강처럼 넘실대는 붉은 낙엽의 향연은 거칠고 평평한 세부 처리를 무시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흑백이었다면 전혀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을 시골 어귀가 펄럭이는 붉은 망토를 두르고 우리에게 색채의 마술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