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대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풍부한 건축물이다.
건축에는 당대의 문화와 사람이 집약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축물로 가득한 도시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1인 가구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20년까지 전체 가구 수의 30퍼센트에 이르는 수준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고령화로 인해 혼자 살아가는 노령 인구가 많아졌고, 결혼을 하지 않는 청년도 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취약하다는 것. 그러다 보니 실내 공간 위주로 형성된 현대사회에서 작은 집에 사는 1인 거주자는 상대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도 큰 집보다는 작은 집이 많았다.
그래도 삶의 질이 지금보다 높았던 이유는 마당 같은 외부 공간이 있고, 집 앞 골목길처럼
이웃과 공유하는 공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의 경우에도 10년 전까지 4인 가족이 주류였으므로, 한 사람당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20평 가까이 됐다.
지금의 1인 가구가 8평 이하의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3배인 셈이다. 1인 가구 거주자는 거실 대신 SNS(사회적 관계망 서비스)에서 사람을 만난다. 특정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밥 한 끼 값을 지불하는 커피숍처럼
말이다. 삶은 점점 여유가 없어지고 답답해진다.
뉴욕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원들이다. 사진은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우리만큼 1인당 생활 면적이 좁은 도시가 있다. 바로 뉴욕이다.
하지만 뉴요커들의 삶은 우리와 다르다.
집은 좁아도 주변에 소비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센트럴파크나 브라이언트파크 등 각종 공원이 촘촘히 분포해 있고, 광장에서는 수시로 장터가 열린다. 게다가 뉴욕현대미술관MoMA 같은
세계적 미술관을 매주 금요일마다 무료로 즐길 수 있다.
뉴욕에선 10분만 걸으면 탁 트인 공용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실제 뉴욕 맨해튼의 공원 분포를 보면 10km 이내에 10개가 분포한다. 센트럴파크, 브라이언트파크, 타임스스퀘어, 하이라인파크, 해럴드스퀘어, 매디슨스퀘어, 유니언스퀘어, 워싱턴스퀘어, 워싱턴마켓파크, 주코티파크 등이다. 이 공원들의 거리는 평균 1.04km, 보행자 평균 이동 시간은 13.7분이다.
반면 서울은 15km 이내에 큰 공원이 9개 있다. 하늘공원, 선유도공원, 여의도공원,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효창공원, 남산공원, 청계천, 서울숲공원, 보라매공원 등이다. 공원 간의 평균 거리는 4.02km, 보행자 평균 이동 시간은 1시간 1분이다. 산책하듯 가볍게 공원을 다녀올 수 있는 뉴욕과 달리 서울은 평일에 가기 힘든 거리라는 뜻이다. 그러니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지 못한다.
뉴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각종 공원과 광장을 연결하는 보행자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의 차선을 줄이고 보행자 도로, 자전거 도로, 의자가 놓인 공간을 확장했다. 이런 시도는 보행자에게 연속된 경험을 제공하고 공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재미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보행자는 도시 전체를 즐길 수 있게 되며 이러한 해결책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원 간 이동을 위해선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답답한 실내 공간에 대한 기억 때문에 경험이 단절되며 다른 장소로 가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 공간 속에 갇히게 된다.
우리 도시에는 보행자 중심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더 행복해지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걷고 싶은 거리의 단서는 최근의 핫 플레이스에서 찾을 수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익선동 같은 곳에는 모두 골목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다양한 변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변하는 하늘이 머리 위에 있고 몇 발자국만 걸어도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옷 가게, 구두 가게가 있고, 허기를 채울 식당과 잠시 쉬어 가는 카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이성을 만날 기회도 많아진다. 핫 플레이스로 사람들이 몰리는 데는 스마트폰의 영향도 크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영상 매체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주는 자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외부 자극 등이 합쳐져 사람들이 점점 골목길 상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또 사람이 거리를 걷고 싶은 마음이 들려면 ‘이벤트 밀도’가 높아야 한다. 이벤트 밀도는 100m를 걷는 동안 내가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는 가게 입구의 숫자를 말한다. 보통 우리가 걷고 싶다고 느끼는 거리는 100m에 30곳 이상의 다양한 가게가 있다.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그 변화 자체가 재미있으니 걷고 싶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600m를 걷는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그곳은 점점 자동차만 지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서울 강남에서는 잘 걷지 않더라도 뉴욕이나 로마에 가면 즐겁게 걸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거 서울의 골목은
그보다 더 걷기 좋은 길이다. 로마와 은평구의 골목길을 비교해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로마는 650m를 걷는 동안 7군데의
갈림길이 있고, 은평구는 600m를 걷는 동안 15군데의 갈림길이 있다. 각 지점 간의 거리는 각각 80m, 37m였다. 은평구의 골목길은 같은 거리의 로마 골목길에 비해 2배 이상 풍경이 변했다는 뜻이다. 서울에서도 강북의 북촌이나 삼청동 같은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북촌 한옥 마을은 걷기 좋은 길이었던 과거 서울의 골목길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이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던 이유는 당시 다양하고
특색있는 가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뉴욕과 강남, 로마에 있는 길의 단면을 비교해도 걷고 싶은 길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단면적이 0.7㎡라고 했을 때 건물 사이의 공간을 계산해보면 뉴욕 브로드웨이는 사람의 1500배, 강남 테헤란로는 4000배, 로마는 약 130배 정도다. 길의 공간이 이처럼 크다면 사람은 소외감을 느낀다. 반면 은평구의 골목길은 사람의 약 70배에 불과하다. 이곳에서는 건축물이 우리를 포근히 안아주는 듯한 안정감을 느낀다. 이러한 골목길은 우연의 산물이다. 구릉을 따라 촌락이 형성되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 골목이 되었다.
자연 발생한 골목길은 걷기 좋은 길, 소통을 위한 길로 보존해야 한다. 고층 건물로 신축하더라도 골목의 형태를 그대로 두거나, 골목길 주변에 단층 건물을 짓고 고층 건물은 그 뒤에 배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엇보다 건물의 입구와 창 등이 골목길을 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예전의 골목길을 유지할 수 있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다른 방법으로도 활성화할 수 있다. 성공적인 상업 가로는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라인과 공원 사이에 만들어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대표적인 사례가 보스턴의 뉴베리 거리와 신사동 가로수길이다. 현재 로데오거리에는 자연 녹지 공원이 없지만 인근에 있는
도산공원을 활용할 수 있다. 현재 도산공원은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으며, 특히 로데오거리 방향으로는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담장을 허물고 공원을 주변 상권과 접하게 한다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공원을 통해 우리나라의 도심 속 공원이 지닌 문제를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대로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 공원은
대로변 가까이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센트럴파크, 타임스스퀘어, 브라이언트파크 등을 1km 간격으로 줄줄이 만난다. 반면 우리나라의
공원은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이런 경우 시민의 생활과 도시경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대로에 공원이 접해 있다면 대로를 이동하는 수많은 시민에게
시각적인 쾌적함을 주고, 언제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떠올려보라. 지금의 공원은 도로를 벗어나 한참 들어가야 하는 휴게소와 다름없다. 공원을 대로변에 배치하면 도시경관이 좋아지고 더 많은 사람이 걷고 싶은 도시가 될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적절한 배치로 쓰임새와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클래식을 전공한 한 친구는 연주자로 살지는 않지만 악기를 전공한 덕분에 많은 클래식 곡을 즐길 수 있어 인생이 풍요로워졌다고 말한다.
필자는 건축을 즐긴다. 건축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거나 길을 걸을 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색다르게 보고 느끼게 된다.
음악을 꾸준히 들으면 듣는 귀가 생기듯이 모두가 건축을 이해하고 주변의 공간을 읽어내고 나름의 방식으로 건축을 즐기기 바란다. 건축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키운다면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건축도 우리의 행복에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건축물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한다.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해야 하며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을 만들 때 우리는 건축물 자체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 건축물이 담아내는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질 사람들의 삶과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스스로 자신이 살 곳을 더 화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어디서 살 것인가>,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어디서 살 것인가>는 건축가 유현준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저자는 도시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어떤 공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자문하고, 다른 도시의 사례를 통해 도시가 갖출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살펴본다.
또 우리 도시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고, 우리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