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LIFESTYLE
2023. 07. 04
고대 이집트의 대표 아이콘
‘피라미드’의 신비
이집트
img
17~18세기 유럽에서는 세계 부호들이 자녀에게 넓은 세계관을 가르치기 위한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발달했다. 영국의 가톨릭 신부 리처드 라셀스의 저서 <이탈리아 여행>에서 처음 등장한 그랜드 투어라는 표현은 ‘인문 기행’의 대명사로 쓰였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 유적지 피라미드에서 파라오가, 고대인이 전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사회질서를 위해 세운 피라미드
지난 3년간 굳게 닫혔던 하늘길이 열리며, 원하던 곳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에도 취향이 반영되는 시대, 이티원 여행사와 고객 30여 명과 함께 고대 이집트로 향했다.

피라미드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고대 이집트문명과 관련한 어떠한 소재도 피라미드 정도의 관심은 받지 못했다. 또한 피라미드는 그 압도적 규모와 높은 수준의 공학적 완성도, 그리고 그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족한 관련 기록들 때문에 오래도록 큰 미스터리로 다뤄져왔다. 피라미드를 둘러싼 의문점들 가운데 많은 것이 미해결 상태지만, 그렇다고 피라미드에 관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일반적으로 ‘절대 권력을 지닌 고대 권력자의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사각뿔 모양의 거대한 왕묘’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절대 권력을 지닌 군주는 아니었다. 파라오는 절대군주라기보다는 ‘우주적 정의이자 질서’ 정도로 번역되는 ‘마아트Maat’를 잘 유지해야 하는 일종의 공무수행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을 세우는 작업은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보다는 사회 전체의 목표를 염두에 둔 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다. 하지만 개별적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가령 기자Giza에 있는 대피라미드는 ‘쿠푸의 지평선’, 다슈르Dahshur에 있는 스네페루Sneferu, 재위 BC 2613~2589의 굴절 피라미드는 ‘남쪽의 빛나는 것’이라 불렀다.
조세르 시대, 최초의 피라미드 건립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기자, 아부시르Abusir, 사카라Saqqara, 그리고 다슈르와 메이둠Meidum을 지나 파이윰Faiyum 오아시스로 들어가는 길목인 리쉬트Lisht와 라훈Lahun, 하와라Hawara 등에 이르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져 일종의 거대한 피라미드 띠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기자에서 다슈르까지는 지역 전체가 ‘멤피스와 네크로폴리스-기자에서 다슈르까지의 피라미드 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피라미드 유적은 대부분 현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사카라에서 최초의 피라미드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피라미드가 건설되던 고왕국 시대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무덤이 만들어지는 공동묘지 구역이었다.
img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파라오 조각상. 피라미드는 이집트 파라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 전체의 목표를 염두에 둔 노력의 일환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사카라에서 만날 수 있는 최초의 피라미드는 바로 고왕국 3왕조 시대의 파라오 조세르Djoser, 재위 BC 2667~2648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마스타바Mastaba 무덤을 6개 층으로 쌓아올렸다. 마스타바 무덤직사각형 형태의 상부 구조를 갖춘 것으로, 파라오들이 자신의 무덤을 피라미드로 만들기 이전 시대에 사용하던 형식이다. 조세르 시대에 갑작스럽게 마스타바에서 피라미드로 무덤 양식이 바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최초의 피라미드는 세상을 떠난 후 천상에 오르고자 했던 파라오의 의지가 물리적으로 구현된 결과물로 보인다.
스네페루 시대, 시행착오의 피라미드들
조세르 이후 3왕조 시대에 2~3기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더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후니Huni, 재위 BC 2637~2613 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일반형 피라미드 건축이 시도되었다. 일반형 피라미드란 완전한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를 뜻한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가 거의 100m에 이른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높이가 62m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피라미드의 규모가 훨씬 커졌다.

후니의 피라미드는 메이둠에 세워졌다.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7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후니는 안타깝게도 피라미드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사위 스네페루가 장인의 피라미드를 계속해 지었다. 왕위 계승 과정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내려오던 계승이 단절된 만큼 스네페루의 재위 기간부터 4왕조 시대로 구분한다. 그런데 후니의 피라미드는 완공 직후 붕괴되고 말았다. ‘붕괴 피라미드’ 혹은 ‘무너진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공학적 완성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 경사각을 너무 가파르게 만들어 붕괴된 것으로 추측한다.
img
다슈르의 ‘굴절 피라미드’
한편 스네페루는 메이둠에서 선왕의 피라미드를 짓는 동시에 다슈르에서 자신의 피라미드를 동시에 짓기 시작했다. 파라오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집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슈르의 피라미드도 처음에는 메이둠의 피라미드처럼 외부 경사각이 50도가 넘는 모습으로 지었다. 하지만 이 피라미드를 절반쯤 지었을 때 메이둠에서 피라미드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건축가들은 피라미드의 상단부 경사각을 43도로 낮추는 것을 선택했다. 그 까닭에 오늘날 ‘굴절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스네페루는 이 기이한 형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끝내 새로운 피라미드 건설을 건축가들에게 명했던 것 같다. 결국 건축가들은 다시 계획을 세워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이 새로운 피라미드 역시 다슈르에 지었지만, 설계는 조금 변경했다. 최초로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사각뿔 피라미드였다. 현대의 학자들은 외장석이 다 떨어져나가 석양을 받으면 붉게 보인다는 이유로 이 피라미드에 ‘붉은 피라미드’라는 별칭을 붙였다.
피라미드 상식 1 : 굴절 피라미드
피라미드의 건설 과정의 시행착오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여주는 산물로 ‘붉은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이상적 규모와 형태의 완성
스네페루 시대의 여러 시행착오는 피라미드 건축가들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아들 쿠푸Khufu, 재위 BC 2589~2566 시대에는 피라미드 건축술이 모든 측면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 위대한 업적은 카이로 근교에 위치한 기자에서 만날 수 있다. 기자에는 총 11기에 이르는 피라미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쿠푸, 카프라Khafra, 재위 BC 2558~2532, 멘카우라Menkaura, 재위 BC 2532~2503 등 3대에 걸쳐서 지은 것들이다. 11기의 피라미드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파라오의 무덤으로 사용했던 피라미드들이다.

나머지 8기의 피라미드는 모두 왕실 여성들의 무덤으로 사용했거나, 실제 무덤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상징성만 띠고 있는 자그마한 규모의 것들이다. 3기의 피라미드 가운데 먼저 지어졌고, 가장 큰 규모를 가진 것은 쿠푸의 피라미드다. 밑변의 길이가 230m나 되고, 높이는 146m에 이른다. 사용한 석재 블록의 개수도 약 260만 개, 피라미드 전체 무게는 7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쿠푸의 피라미드는 그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대피라미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스네페루가 꿈꿨던 이상적 규모와 형태를 지닌 피라미드가 비로소 그의 아들 시대에 성공적으로 건설된 것이다.
img
기자에서 세 번째로 지은 멘카우라의 피라미드
기자에서 세 번째로 지은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는 기자의 피라미드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다. 쿠푸와 카프라의 피라미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지만, 사실 이 피라미드의 높이도 65m에 이른다. 그런데 인근에 세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피라미드보다 크기가 현저하게 작은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규모를 축소한 이유는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 카프라와 할아버지 쿠푸의 지나치게 거대한 피라미드 건설 프로젝트 때문에 국가의 인력과 기타 자원이 모두 고갈되었고, 결국 멘카우라 시대의 이집트에는 이 정도 규모의 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는 사회적 역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피라미드 상식 2 : 맨카우라의 피라미드
기자에서 세 번째로 지은 피라미드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쿠푸와 카프라의 것이 워낙 커서 왜소해 보일 뿐이다.
피라미드의 쇠퇴와 재등장
실제로 멘카우라 시대 이후의 피라미드들은 그 규모가 급속하게 작아졌다. 기자와 사카라 사이에 위치한 아부시르에서 이러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아부시르 시대의 피라미드는 기자 시대의 피라미드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공학적 견고함과 세련됨의 수준도 상당히 낮았다.
img
사키라에 있는 우나스의 피라미드
현재 이 피라미드들은 외부가 거의 다 무너져 모래 언덕이나 돌무지 같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아부시르 시대 이후에 지은 피라미드들도 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카라의 조세르 피라미드 인근에 세워진 5왕조 시대의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Unas, 재위 BC 2375~2345의 피라미드와 6왕조 시대 파라오 테티Teti, 재위 BC 2345~2323의 피라미드 역시 언뜻 보면 그냥 모래 언덕으로 보일 뿐이다. 이 피라미드들은 모두 그 규모가 현저히 작아져 높이가 40~50m 정도에 불과하다. 우나스 시대부터는 죽은 파라오의 영생을 돕기 위한 기도문을 피라미드 내부에 기록하는데, 이를 ‘피라미드 텍스트’라 한다. 우나스 시대 이전에 지은 피라미드들이 내부에 어떤 글귀도 쓰지 않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중왕국 시대 이후 제2중간기를 지나면서 피라미드는 점차 왕묘로는 사용되지 않았고, 결국엔 완전히 사라져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파라오들은 무덤을 지상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위치에 암굴묘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신왕국 시대의 왕묘들은 룩소르Luxor 서안에 위치한 한 구역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구역을 오늘날 ‘왕들의 계곡’이라고 부른다. 파라오들이 피라미드를 포기하고 암굴묘 형태로 무덤을 만든 것은 무덤이 도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다 실패했다. 모든 왕묘는 다 도굴되었고, 오로지 18왕조 말엽의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en, 재위 BC 1336-1327의 무덤만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되었을 뿐이다.
피라미드 상식 3 : 우나스의 피라미드
공학적 견고함과 세련됨의 수준이 상당히 낮았다. 피라미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클릭하시면 같은 키워드의 콘텐츠를 모아볼 수 있습니다.
#여행 #인문 #문화 #VIP
글. 곽민수(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
COPYRIGHT 2021(C) MIRAE ASSET SECURITIES CO,.LTD.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