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LIFESTYLE
2024. 07. 29
보랏빛 여름의 나날들
계절을 품은 명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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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계절은 정반대의 온도가 교차한다. 숨 막히는 강렬한 태양과 온몸에 소름 돋는 에어컨 바람, 무겁고 포근한 모래찜질과 파라솔 아래 길게 누운 그림자, 개구리 노랫소리에 잠 못 이루는 열대야와 얼음 동동 띄운 수박화채….
계절마다 상징하는 컬러가 있다면 여름은 붉은색과 푸른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보라색에 가깝다. 두 가지 색의 비율에 따라 정열적이게도, 창백하게도 느껴지는 보라. 화가가 바다, 해수욕장, 들판, 정원, 도심 등에서 보낸 여름의 나날 속 보랏빛 ‘서머타임’에 빠져본다.
화가와 바다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사실주의Realist의 선구자다.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리얼리스트 정신을 표방했다. 프랑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변화할 무렵, 쿠르베는 시인 보들레르와 어울리며 사회 변화와 현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쿠르베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모두 거부했다. 낭만주의는 너무 개인적인 감정을 따르고, 신고전주의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농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처럼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슈가 되었고, ‘천재’ 혹은 ‘끔찍한 사회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람, 동물, 정물, 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린 쿠르베의 그림은 초기에는 어둡고 절제됐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따뜻하고 밝아졌다. 특히 말년의 쿠르베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 지대 쥐라산맥의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신비롭게 솟아오르는 물을 포착해 그렸다. 그가 간 질환으로 사망하기 2년 전 완성한 작품 ‘노르망디 해변’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을 거친 붓질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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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헤닝센, ‘호른베크 해변에서의 여름날’
덴마크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프란츠 헤닝센Frants Henningsen, 1850~1908은 주로 노동자계급이나 상류층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특히 극적인 구도와 예리한 묘사, 어두운 톤을 사용해 인간의 결핍과 고통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18세기 후반 코펜하겐 출신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도시 북쪽의 시골과 해변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는데, 그중에서도 리조트 타운이던 호른베크는 인기 휴양지였다.
작품 ‘호른베크 해변에서의 여름날’은 덴마크의 호른베크 해변을 배경으로 웅덩이가 생긴 해수욕장, 푸른 잔디, 돛단배가 떠 있는 바다, 하얀 구름과 수평선을 묘사했다. 그림 중앙의 웅덩이에서 반사되는 맑은 하늘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헤닝센은 1873년 덴마크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 비고 요한센, 크리스티안 사르트만과 함께 호른베크에 도착했다. 4명의 젊은 예술가는 호른베크의 바다, 넓은 해변, 지평선 너머 보이는 스웨덴 쿨렌의 푸른 언덕에 매료되어 뉴질랜드 북부 해안선을 따라 정착했다.
또 헤닝센은 호른베크에서 살아가는 어부의 삶에 이끌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어부의 초상화를 남겼다. “나는 올해 엄청난 여름을 보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안절부절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난생처음으로 도시의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여름 전체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녹음과 함께하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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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코트니 커런, ‘여름’
찰스 코트니 커런Charles Courtney Curran, 1861~1942은 인상주의자로 광활한 자연 속에 풍경처럼 서 있는 여인을 즐겨 그렸다. 커런의 작품은 느슨한 붓놀림과 아련한 색감이 트레이드마크인 인상주의 기법으로 마음속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903년 동료 예술가 프레더릭 델렌보는 커런을 예술인 마을 ‘크래그스무어’에 초대했다. 미국 허드슨강 계곡의 고원에 위치한 이곳 풍경에 푹 빠진 커런은 바로 여름 별장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학생들을 위한 미술 출판물을 편집했다.

크래그스무어를 배경으로 한 작품 ‘여름’은 커런의 화풍이 잘 드러나는 걸작이다. 이 그림에는 뽀얀 드레스를 입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녀들이 등장한다. 하얀 꽃이 만발한 들판과 솜사탕을 닮은 양떼구름이 이들을 둘러싸며 더욱 환상적인 무대를 연출한다. 커런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가장 앞쪽 중심축에 세우고, 꽃밭을 대각선 구도로 비틀면서 그림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인물의 뒤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이 여름의 순간도 언젠간 세월 따라 흘러가겠지만, 행복했던 기억만은 여전히 수십 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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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마르케, ‘정원의 길’
고요한 해안과 항구 풍경화로 유명한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1875~1947는 빛, 색상, 공간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났다. 그는 표현력 넘치는 컬러와 단순한 형식미를 사용해 야수파 스타일로 두각을 나타냈다. 1890년 파리로 이주해 미술대학을 다니는 동안 야수파의 대가 앙리 마티스와 절친해졌고, 앙드레 드랭·조르주 브라크 등과 함께 1905년 살롱 도톤에 출품했다. 이 전시에서 ‘야수Fauves’라는 용어가 처음 만들어졌다.

마르케는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북아프리카 주변의 해안가와 풍경에 중점을 두고 광범위하게 여행을 떠났다. 특히 노르망디, 베네치아, 알제리의 항구를 그리면서 점차 자연주의적 스타일로 발전해 나갔다. 그는 압축된 볼륨감과 공간감을 유지하면서 날씨 와 빛의 특징을 꼼꼼히 연구했는데, 어느 날 마르케의 작품을 본 마티스가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붓글씨와 단순성을 비교하기도 했다.

작품 ‘정원의 길’은 마르케가 말년에 그린 정원 풍경화다. 녹음이 짙은 한여름의 정원을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시원한 모양새로 구불거리는 나뭇가지와 풍성하게 만개한 장미들, 금방이라도 매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이 무릉도원에서 늙은 화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환희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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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파리의 몽토르귀유. 1878년 6월 30일 기념식’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색채를 섞지 않고 직접 칠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인상주의 양식을 처음 선보였다. 모네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순간순간 변화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연작으로 실현해냈다. 르네상스 이후 전통이었던 ‘필치’에 의한 묘사와 원근법을 과감히 버리고, 손 기술로 만들어내는 ‘필촉’을 새로운 수법으로 체득했다. 점이나 짧은 선으로 이루어진 필촉 수법이 유행하면서 화가들은 이제 한 장의 캔버스를 ‘움직임’을 담아 내는 화면으로 인식했다.

작품 ‘파리의 몽토르귀유. 1878년 6월 30일 기념식’은 제3회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행사를 포착했다. 모네는 거리의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높은 건물의 창문에서 관찰하는 시점으로 여름날 행사의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점을 찍듯 수많은 색채 스트로크로 구성된 프랑스 깃발과 군중. 가까이에서 보면 색채가 옅어지며 상이 흐려지지만, 멀리서 보면 환희에 찬 거리가 눈앞에 또렷해진다. 모네는 살아 있는 현실을 캔버스에 옮기는 마법을 실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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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라투슈, ‘기쁨의 축제’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 ‘폴리베르제르의 바’에서 멍한 표정의 여성 바텐더를 그린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뒤편에 모자를 쓴 신사가 보인다. 조연처럼 등장한 이 남성이 바로 모네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 가스통 라투슈Gaston La Touche, 1854~1913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라투슈는 독학으로 예술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노동자계급의 가난한 삶을 회색조로 그렸으나, 마네와 가까이 지내면서 따뜻한 컬러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심지어 1881년에는 낡고 어두운 그림을 모두 모아 불태우기도 했다. 이후 라투슈는 유화, 파스텔화, 수채화 등으로 요정이 있는 숲속, 꿈처럼 몽환적인 풍경, 즐거운 축제 현장을 그렸다. 작품 ‘기쁨의 축제’는 라투슈의 대표작 중 하나로, 물가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을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섬세한 붓 터치와 부드러운 색감은 여름밤의 열기와 환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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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계절(여름)
글. 이현(<아트인컬처>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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