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쥬라기 공원>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스크린 화면에 오래전 역사 속에서 사라진 공룡을 완벽히 소환해냈다. 살기등등한 티라노사우루스의 사실적 모습을 보며 관객은 기술의 진전에 경의를 표했으며, ‘언젠가 공룡과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비현실의 현실화는 인간의 욕망이다. 이제 그 꿈이 음악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ABBA가 아바타가 되어 팬들의 가슴에 불꽃을 심고 있다. 맘마미아!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체득해서 일상의 변화를 꾀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옛 선조가 남긴 기록을 보면서 지혜를 키웠고, 그림을 통해 막연한 상상을 구체화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림에 이어 발달한 사진술은 원근법과 착시 현상을 이용해 실제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고, 사진을 빠르게 이어 붙여 움직이는 화면은 점점 발전해서 영화를 탄생시켰다.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가 원작인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영화 <달세계 여행>이 개봉한 1902년, 인류는 처음으로 달을 경험했다.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밟기 67년 전의 일이다.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영상화한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영화 <달세계 여행>은 인류를 처음으로 달까지 안내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넘게 흐른 지금, 인간의 기술력은 마침내 없는 것을 눈앞에 나타나게 하고 있다. 기기만 있으면 어디로든 이동하고, 누구와도 자유롭게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 애플의 신제품 ‘비전프로’는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라는 개념 속에서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을 구현하는 스마트 디바이스다. 고글 형태의 기기를 착용하면 현실과 결합한 가상 세계가 펼쳐진다. 비전프로를 쓰고,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인터넷 기사와 주식 정보, 동료와의 영상통화 등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ABBA 멤버들은 모션 캡처 슈트를 착용하고 160대 카메라 앞에서 직접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현실감 넘치는 아바타 제작을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최근 음악계에도 이처럼 현실과 가상을 접목해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선 사례가 있다. ‘댄싱 퀸Dancing Queen’의 주인공 아바ABBA 이야기다. 1972년에 데뷔한 이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넘어 미국에서까지 큰 인기를 누린 1970년대 대중음악의 상징이자 스웨덴의 영원한 자랑이다. ‘워털루’, ‘허니 허니’, ‘기미! 기미! 기미!’, ‘맘마미아’, ‘SOS’ 등 끝없는 히트 퍼레이드가 그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뮤지컬 <맘마미아!>는 올해도 국내에 선보여 많은 팬과 만났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아바의 유산과 달리 이들의 시간은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1982년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단한 후 팀 활동은 하지 않았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멤버들은 복귀 가능성을 일축하곤 했다. 이러한 가운데 새 앨범이 기적처럼 찾아왔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그룹은 무려 40년 만에 아홉 번째 정규 앨범 <Voyage보야지>를 발표했다. 오랜 공백 끝에 나온 신보는 팬들의 벅찬 환영과 함께 세계 각국의 차트를 석권했고, 250만 장 넘게 팔리면서 그해 아델Adele의 신작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 됐다.
재결합의 감동은 이듬해 열린 첨단 버추얼 콘서트 ‘ABBA Voyage아바 보야지’에서 폭발했다. 70대 중후반의 연로한 멤버들은 직접 무대에 오르는 대신 가상의 캐릭터를 앞세웠다. 팀 이름을 딴 ‘아바타스ABBAtars’라는 이름의 이 캐릭터들은 멤버들의 1979년 당시 모습을 토대로 만들었다.
아바의 멤버들은 실제 같은 아바타를 만들기 위해 5주 동안 160대의 카메라 앞에서 모션 캡처 슈트를 입고 노래했다. <스타워즈>부터 <반지의 제왕>까지 할리우드의 특수 효과 대작을 다수 담당한 조지 루커스의 회사 인더스트리얼 라이트 & 매직Industrial Light & Magic이 제작을 맡았고, 140명의 애니메이터가 투입됐다. 런던에는 이들만을 위한 전용 공연장까지 지었다.
ABBA의 버추얼 공연 투어가 열린 영국 런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 내에 지은 탈착식 팝업 극장. 디지털 아바타 공연이 펼쳐지는 극장에는 3,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사실 아바는 원래 공연에 주력하는 아티스트가 아니다. 1970년대에 몇 번의 투어를 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주로 음반과 노래로 팬들과 만났다. 전성기에도 아바의 무대를 직접 본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무대 복귀는 의미가 컸다. 그 시절 아바를 사랑한 오랜 마니아 입장에서도 감동이었지만, 특히 아바의 음악을 후대에 접하고 팬이 된 젊은 세대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5월 시작한 이 공연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3,000석 규모의 전용 공연장 ‘아바 아레나’에서 매달 30회 내외의 공연이 열리고 있지만 빈자리가 드물다.
오직 런던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팬들이 몰려들었고, 지금까지 팔린 티켓수는 100만 장을 웃돈다. 런던 일정이 마무리되는 내년 5월 이후엔 아바 아레나를 해체하고 이동해 세계 각국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홀로그램 등을 활용한 버추얼, 즉 가상 공연은 앞으로 공연의 새로운 장을 열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직접 무대에 올라야 하는 아티스트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선 분명히 강점이다. 가상 공연은 3~4일 연속으로 하는 것은 물론, 하루에 두 번도 거뜬히 할 수 있다. 여건만 허락한다면 서로 다른 도시에서 동시에 개최하는 것도 가능하다. 뮤지션의 컨디션 조절과도 무관하니 공연의 품질관리도 어렵지 않다. 특히 아바와 같은 고령의 아티스트에겐 더없는 기회다. 1947년생 싱어송라이터 엘튼 존은 더 이상 월드 투어를 진행하지 않겠다며 투어 은퇴를 선언하고 5년에 걸친 마지막 세계 순회공연으로 1조 원 넘는 수익을 냈지만, 원한다면 홀로그램 투어로 다시 한번 각국의 팬들을 만날 수 있다. 시공간의 한계를 허무는 것이다.
‘ABBA Voyage’가 공연 개막까지 5년 넘게 들인 총 제작비는 2,300억 원에 달한다. 누구나 쉽게 도전할 만한 공연 방식은 아니지만, 팬들의 그리움에 대한 위로는 되어준다. 아티스트를 직접 보길 원하는 이들까지 기꺼이 공연장을 찾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바는 이 지점에서 성공했다.
이전에도 홀로그램 형태로 무대에 등장한 가수들이 있다. 마이클 잭슨, 2PAC, 휘트니 휴스턴 등 대부분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이다. 국내에서도 김광석, 거북이의 터틀맨, 김현식 등 일찍 세상을 떠난 가수들이 홀로그램으로 무대에 다시 올랐다. 다시 볼 수 없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준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모습에 불편함을 느꼈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2016년 미국의 한 TV 쇼에서 휘트니 휴스턴과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버추얼 무대가 기획되었으나, 결과물을 본 유족의 반대로 방송이 무산되기도 했다.
이는 버추얼 공연이 넘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치밀한 준비 끝에 시작한 아바의 홀로그램 투어는 버추얼 공연의 새 역사를 쓰며 순항 중이다. 애플의 비전프로 같은 XR 기기가 우리 일상에 안착한다면 코로나19 시기에 수없이 이뤄진 평면적 비대면 공연을 넘어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버추얼 공연을 집에서 편리하게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공연 시장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언젠가 아바의 첨단 공연이 한국에서도 열리면 좋겠다. 위용을 뽐내는 아바 아레나를 서울에서 만나는 그날이 오길, 그래서 우리 모두 ‘댄싱 퀸’에 맞춰 춤추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본다.